괴로움을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
나는 변증법을 좋아한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접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내게 꽤나 흥미로운 충격이었다.
그때 나는 세상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 있었고,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에게 시비라도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등굣길은 중학생 시절부터 늘 힘겨웠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괴로울 정도였고,
한때는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책을 접했다.
아마 내용보다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충하는 모순의 갈등 속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운동.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정-반-합'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추구하고, 실천해 나가다 보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오지 않을까,
그런 희망의 원리를 믿기 시작했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철학적 신념이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중학교 1학년, 일요일 오후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기분 좋은 날,
거실에서 게임을 하던 중,
베란다 너머에서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놀란 마음에 베란다로 뛰쳐나가 밖을 보았고,
윗층의 또래 여자아이 두 명이 울고 있었다.
“우리 아빠 아니야… 아니야…”
밑을 내려다보니,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윗집에 놀러온,
15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남자였다.
대화 중 잔소리를 듣고,
충동적으로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은연중에
삶의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던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시간들.
그 우울함과 충동들을
어떻게 해소했는지 묻는다면,
기묘하게도 그 대답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었다.
그 사상이 나를 구했다.
이 세상이 모순투성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 모순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그 철학이,
내 삶을 붙잡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