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찾아서(2)

90년대 우리들의 풍경에 대한 소회

by John

스타크래프트, 리니지, 바람의 나라 같은 게임들은 남자아이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문방구 앞 오락기에서 더킹97이나 스트리트파이터를 하는 것보다, 오락실에서 펌프를 하면서 터키행진곡을 마스터하는 것보다도 즐거운 일이었다.

IMF라는 사건은 PC방 덕분에 이겨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당시 PC방은 항상 사람으로 가득했다. 학교가 끝나고 들르는 PC방에는 밤을 샌 듯한 아저씨들이 있었고, PC 앞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찌를 때마다 너무 싫었다.

98년도에는 월드컵이 열렸다. 그해 월드컵은 나라 사정처럼 무력했다. 승리보다는 실점 위기를 벗어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일이었다. 차범근 감독은 중간에 경질되었고, 네덜란드에겐 5대 0으로 대패하였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가 비 오는 날 엄마와 함께 비옷을 입고 은행이 없어지는 것에 답답함을 호소하며 길거리로 시위하러 나가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축구공 하나 들고 2년간 졸라서 산 축구화는 결국 빵꾸가 났다. 너무 신나서 등하굣길에도 신고 다녔던 터라 축구화의 스터드는 다 갈려서 없어졌지만, 그래도 축구할 때는 꼭 축구화를 신었다. 매일 학교에서 먹던 우유는 어쩌다 반 친구가 제티를 나눠줘서 초코우유를 만들어 먹을 때면 행복했다.

출근이 늦어져 마음이 급하셨던 아버지는 전근으로 인해 전학한 첫날, 나를 학교 교문 앞에 내려주고 떠나셨다.

나는 혼자서 반에 들어갔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보고 처음으로 한 말은, "너 혼자 왔니? 어떤 부모가 전학 온 애를 혼자 보내?"였다. 그때 선생님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선생님에게 찍혔는지, 가만히 수업을 듣고 있어도 구박을 받았다. 앞에 앉은 반장 여자아이가 떠들었는데도 혼나는 건 나였다. 어느 날은 급식시간에 못 먹는 음식이 나와서 "저는 이 반찬은 못 먹어요."라고 했다가 반찬을 푸던 집기로 뺨을 맞았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0주년이라고 자랑스러워하시던 은행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다는 말에 가슴 졸이던 시간에, 내 일은 사소한 일이라고 스스로 치부해 버렸다. 마침 은행에서 시행한 대회에서 아버지가 우수사원으로 표창을 받아 회사 지원으로 호주 가족여행도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더욱 그랬다. 마치 나도 아버지처럼 은행 직원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

결국 아버지는 실직하셨다.

한번은 학교에서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라에서 쌀을 지원해 준다며 선생님이 손을 들라고 하셨다. 나는 손을 들었고, 아버지께 크게 혼났다. 순수했는지 순진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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