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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와르 Aug 28. 2024

시간을 멈추게 하는 악박골

서대문 속으로

악박골에서 어둠까지

우리가 걷는 수많은 길에는 다양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 그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사라져서 기억할 수 없는 곳도 다.

"타임신문사 발자국 기자입니다."

"이름이 특이하군."

"닉네임입니다."

노인은 내 닉네임에 크게 웃었다. 그리고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여기는 모화현 아랫마을이었네.”

노인에게 처음 듣는 지명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웬일인지 지명 속에서 답답함이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아마 오래전 교과서에서나 들어 보았던 <모화관>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현저동에 중국 사람들도 많이 살았어.”

팔십은 넘었을 노인은 연희동 차이나타운이 조성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모화현보다 더 오래된 지명은 악박골이라고 했다.

악박골은 안산 아래 있던 악바위 주변의 마을이었다. 악바위틈으로 흘러나오는 영험한 약수가 있었는데, 이를 영천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물이 차디차므로 냉천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대로 지역명으로 남기도 했다.

노인은 계속된 자신의  이야기에 재미를 붙이는 듯 신명 났지만, 나이 탓인지 금방 지치는 듯 보였다.

그의 이마에 엉겨 붙은 깊은 잔주름만큼 마을 이야기가 내 마음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참 많은 이야기가 있던 마을이었는데 말이야.”

그는 뜻 모를 말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사형장 앞에선 노인의 모습은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예가 마을 한 중간쯤 되겠군.”

형무소의 사형장은 꽤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독립 의지를 불태우던 수많은 열사들의 처형 장면이 겹쳐지는 듯 몸서리를 치게 했다.

그 자존감과 위엄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자리에 잠시 주저앉았다.

“왜 나는 죽어야 했나?”

“네?”

힘에 겨웠는지 다리를 손수 주무르던 노인의 뜻 모르게 던진 말에 깜짝 놀랐다.

“아,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수많은 열사가 여기서 옥사하셨는데, 그 같은 분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 죽어 갔으며 그 한은 쉽사리 멈출 수 없으리라는 뜻이다.

나라의 존망이 눈앞에 다다라 왔을 때까지 역사의 필름이 사형장에서 잠시 멈춰버린 느낌이다.

“악박골 호랑이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지.”

그리고 노인의 말은 무슨 역사책처럼 술술 이야기를 토해냈다.

사형장의 원류를 찾는다면 그 호랑이 출현으로 10명이 돼야 이 일대 무학재를 넘어야 했다.

“유인막을 만들어서 군졸들이 경비하도록 했지.”

군졸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비싼 통행세를 내라고 압박했다.

“호랑이보다 유인막이 더 무섭다고 했지.”

모화관의 사신보다 일제의 침략보다 무서운 것이 내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 많고 영험했던 악박골의 물은 탁해지고 나라의 운명은 지금의 사형장 신세가 되었다는 망극한 결론으로 접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너무 억지를 부렸나?”

“아닙니다.”

사실 좀 당황스러운 연결이었다.

하지만, 사형장 앞에서 잠시 과거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느낌이다.

“잠시 여기서 쉬어 가겠네.”


거꾸로 가는 시간을 얻는다면,

나는 노인을 두고 통곡의 미루나무 앞에 섰다.

미루나무서 우연히 잎 한 장이 떨어진다. 마치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귓전을 지나쳤다.

“사연?”

흥미로웠다. 바람처럼 시간은 흘렀지만, 역사는 남았다. 사형수가 된 사람들의 하루가 보일 것만 같았다.

시간은 많이 죽었다.

그만큼 역사도 현실도 크게 바뀌어 갔다.

간혹 열사를 밀정으로 실추시키고 입맛대로 역적을 충신처럼 받드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으므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화현 아랫마을에는 수많은 고갯길이 있었다.

그 길 한 귀퉁이에는 붉은 벽돌 건물이 보였다. 삐걱거리는 감옥 문을 열며 기웃기웃하다가 다시 복도로 나왔다.

“거기는 올라가지 말 게.”

노인이 어느새 내 뒤에 와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발길이 통제된 형무소의 2층 계단 입구에 있었다.

“거기엔 못 올라가네. 날 따라오게.”

노인은 충분히 쉬었던지 표정이 매우 밝아 보였다.

그는 박물관을 나와 어떤 마을 골목으로 들어갔다.

“역사를 좋아 하나?”

“그럭저럭요.”

내 모호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노인이 헛웃음을 켰다.

“이곳 역사는 잘 모르겠군.”

낮고 은근한 향기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듯했다. 그를 따라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지 몰랐다.

벅찬 느낌이었다.

협소한 골목을 빠져나오자, 계단이 수두룩한 달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옛 차림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민속촌을 꾸몄나 보군요.”

“그렇지! 옛것을 복원시킨다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야.”

중국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치 모화관이 있었을 때처럼 보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뒤돌아보며 노인이 활짝 웃었다.

“이 많은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자네는 무엇부터 할 텐가?”

나는 일제 전으로 시간을 당기고 싶었다.

그리고 또 모화관이 없는 시간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니 호랑이가 있고 백성들을 지켜주는 군졸들이 있는 시간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가난하지만 영천마을과 냉천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사형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루나무를 안고 마지막 통곡을 할 독립투사도 없을 것이다.

“자네 거기서 뭐 하나?”

노인의 외침에 눈을 떴다. 계단에 잠시 쉰다는 것이 졸았던 모양이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은 거죠?”

엉뚱한 대답에 노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형장부터 다시 시작해 볼까?”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노인의 뒤를 따랐다. 타임머신도 탈 것처럼 달려갔다.

이번엔 사형장에서 비극보다는 희망을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항상 희망만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비극 또한 희망으로 변화할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게!”

참 정정한 노인이었다. 곧 헤어져야 하는 우연한 만남치고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고마웠다.

담뱃값이라도 챙겨드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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