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국이나 이념에 대한 일반적 세미나 혹은 학술 토론을 대할 때마다 한심스러운 기분을 끊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이 따위 고리타분한 이론에 시간을 허비하는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만큼 사소한 이슈들을 끌어안고 목을 매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고 한편으로 우울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게 애국이나 이념적 무장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건 또 그렇지 않다. 이런 단어들이 왜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고 논쟁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건지 모른다는 뜻이다.
근래 이념이란 색깔론을 펼쳐 두고 다수의 국가적 위인을 비열한 잣대로 매도하는 것을 보면 피가 거꾸로 서는 기분이다. 과연 애국이 무엇이며 이념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게 되었다.
전날 충무공 이순신의 말씀처럼 애국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본다. 이념이란 그 나라를 지키는 수많은 생각들의 형상이다.
내가 서대문형무소 박물관을 찾은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 박물관 안에는 보이지 않는 영광의 길이 있다. 애국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초개와 같이 내버리며 정의를 택했던 상징적 의미가 가득한 박물관이다.
언제였던가? 그러니까 1977년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라 사랑 웅변대회를 앞두고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셨던 내용이 떠올랐다.
"애국정신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 중 어떤 누구도 애국이란 단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친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반을 대표해서 웅변할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우리는 애국자를 찾아야 했다. 그때도 나는 나라 사랑이 어느 가게에 가서 과자처럼 사거나 옷처럼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단짝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돼서 애국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떤 친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어갔던 어린아이가 애국자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간 것은 옛 형무소 감옥 앞에 서 있을 때였다. 녹슨 시찰공의 덮개를 열고 감옥 내부를 둘러보았다. 비좁은 방 이곳저곳에 일제의 고문을 받은 열사들의 피가 보이는 듯싶었다.
문득 사람들은 왜 저항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들은 애국이라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젊음을 불태웠을까?
내게는 아주 총명하면서도 엄한 형이 있다. 그런 탓인지 형은 학교 다닐 때부터 부모의 사랑과 신뢰를 담뿍 받았다. 나는 그 형을 질투하고 시기했었다. 왠지 어머니께서 같은 밥을 주어도 같은 반찬을 주어도 형에게는 더 많고 더 맛있는 걸 주는 듯해 보였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내가 못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맞고 있는 상황을 본 형이 부리나케 쫓아와 큰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을 못 하는 형은 일방적으로 맞아 초주검이 되었다. 그 후로는 형이 그 어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도 나는 아무런 불만을 늘어놓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백성들이 총칼로 무장한 일본 순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자문해 보았다. 거기에는 애국이나 이념이 존혀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순국할 때까지 백성들의 나라를 찾으려 얼마나 절규하였던가.
홍범도 장군이 갖은 탄압 속에 처자식을 잃고 연해주며 저 카자흐스탄의 이 국 만 리까지 쫓겨 갔는가. 그리고 숱한 승전보로 얼마나 많은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었던가.
유관순 열사가 만신창이가 되어 옥중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유가 어떤 이념이겠는가. 여기 형무소에는 정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는 게 분명했다. 권력에 빌붙어 졸렬한 애국정신을 강요하는 자들에게 이념 따위를 권장하는 길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일제가 병탄의 추악한 손길을 뻗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악박골이라고 불리거나 모화현 아랫마을로 일컬어졌었다. 모화현이란 지명은 이곳이 얼마나 역사의 오점으로 점철되었는지 알 수 있다.
2020년 전후하여 대형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면서 숱한 옛 골목길이 묻히면서 옛사람의 체취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단지 그 향수로 접근할 만한 곳이 그나마 서대문형무소 박물관일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시찰공 커버를 닫고 옥사 복도를 걸었다. 아마도 독립투사들은 이 복도에서 두 갈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일제가 짜놓은 계획표였을 것이다. 두 갈래 길 중 하나는 고문실로 향하는 길이며, 또 하나는 사형장으로 가는 미루나무길이었을 것이다.
악박골 미루나무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다. 가장 슬픈 길이기도 했지만, 가장 거룩한 길이기도 했다. 악박골의 지명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제 병탄이 시작되기 전까지 형무소 자리는 오랫동안 악박골이라 불렸다.
악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가 있었다. 약수는 주변에 새로운 지명을 이끌어냈다. 영험한 약수라고 하여 ‘영천’이라 했으며, 물이 차디차므로 ‘냉천’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대로 지역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약수가 흐르던 마을은 악박골이라 불렸다.
“참 많은 이야기가 있던 마을이었는데 말이야.”
형무소 박물관을 구경하던 팔십의 노인이 내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노인의 이마에 수많은 잔주름처럼 형무소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미루나무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다들 가셨지.”
노인은 커다란 미루나무 앞에 멈춰 섰다. 마지막까지 독립 의지를 불태우던 수많은 열사가 이곳 사형장 가는 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도록
하느님이 보우와 사 우리나라 만세
기적처럼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 자문해 보았다.
과연 숭고한 열사들의 뒤를 따랐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싶다.
미루나무를 껴안고 사형장으로 사라지기는 싫다. 무섭고 억울한데 어떻게 그런 길을 택하겠는가.
나는 지금 두 갈래 길 앞에 선 듯했다. 정의를 위한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 끝없이 타협하는 길을 택할 것인지 말이다.
나는 지금도 두 가지 단어를 다시금 머리에 떠올렸다. 과연 애국과 이념은 입 밖으로 토해낼 단어인가? 그보다 먼저 이 보이지 않는 미루나무길에 서서 나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