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막막한 '저'이네요..
아들 하나를 둔 직장 다니는 마흔둘 아줌마, 너무 평범한 것 같아 아쉬운 이 말이 다 인 것 같습니다.
지난 40여 년 간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의젓한 딸, 책임감 있는 아내와 엄마, 워커홀릭을 넘나드는 무식한 일꾼, 왠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는 듯한 삶의 과정이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지는 역할, 그것이 무엇이든 참으로 순종적으로 받아들여 왔네요. 순종적이라는 단어가 말 잘 듣고 참한 이미지를 연상시키겠지만, 아무도 모를 저의 속은 타고난 악바리 기질과 만족을 모르는 성장의 욕구로 늘 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표출하고 싶은 내면에 비해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끈질긴 승부욕에 비해 타인과의 경쟁을 드러내 놓고 즐기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욕망으로 가득 찼던 마음과는 다르게 늘 누군가의 눈에 '조용한 모범생'으로 비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책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이 좋았는지, 책 속 세상이 좋았는지, 책 많이 읽는다고 칭찬 받는 내가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학교에서 동시를 써서 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늘 책을 달고 사는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부모님은 '거봐라. 우리 딸' 하듯 좋아하셨고, 그 모습이 어린 저에게 첫 번째 성취감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물어보기라도 하면 그날의 기분에 따라 이 꿈 저 꿈을 옮겨 다녔던 저는 그날 이후 나의 꿈은 작가라고 당당하게 밝혔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적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글'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저의 동생입니다. 다들 대통령, 과학자, 선생님을 꿈이라 운운하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은 기자가 되겠다 했습니다. 저보다 더 많은 책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하더니 글을 쓰고 모두에게 칭찬을 받고, 늘 공부하기 싫어 도망을 다니다가 글을 써서 대학에 입학까지 합니다. 어느 순간 진짜 기자가 되어 있었고, 어릴 적 꿈을 실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저에게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을 두었던 것이 나름 가장 오랜 기간 입에 올렸던 꿈을 단숨에 포기하게 만든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책 읽기가 싫어졌고, 책을 멀리하니 짧은 글 하나 쓰는 일도 점점 막막해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꿈을 슬쩍 바꿨는데, 생각해보면 그조차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그땐 미처 몰랐던 엄청난 굴욕이네요.
야심 차게 품었던 꿈은 좌절되었으나 저는 금세 새 꿈을 찾았습니다. 엄마 아빠를 미래가 반짝여 보이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뭐든 손을 대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인지 무언가를 그리고 만드는 것들에 평균 이상의 재능을 보였습니다. 우연히 엄마를 따라 동네 미술학원에 갔다가 취미반에 들어오라는 선생님에게 괜히 약이 올라 입시반으로 들어가겠다 우기고, 독창성이란 것은 포기한 채 훨씬 먼저 시작한 친구들과 똑같이 그리는 것을 목표로 근성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늦게 시작해서 예중 입시에 성공한 아이, 돌이켜 보면 그 타이틀 역시 엄마 아빠께 드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중, 예고를 다니며 이른 나이부터 시작한 입시를 한 번의 슬럼프 없이 잘 헤쳐 나가는, 자기 관리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때 했던 미미한 '자각'이라곤 '이것도 결국 기술이구나. 배우니 되고 남보다 시간을 더 투자하니 느는구나.'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대단한 재능과 의지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것 같은데, 그게 내 인생에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상위권에 들면 '잘하는 아이'가 되어 모두를 만족시키는데 그거면 됐지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유독 영어와 물리 공부가 재미있었는데 그 사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했습니다. 어차피 미술을 전공할 아이로 정해진 저에게 공부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았고, 저조차도 어쩌다 공부 못해서 그림 한 거 아니냐는 (그 시절 흔했던) 오해를 받을 때 가슴속에 잠시 뜨끈한 스파크가 파바박 튀어 오를 뿐 별다른 오기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반듯하고 지루하게, 그러나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몇 컷의 기억들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며 처음으로 저는 놀라운 결단력을 발휘했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인생에 이토록 큰 반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살짝 도취되고 흥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경영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역시 승부욕은 발동하여 원 없이 공부라는 걸 해 보았습니다. 해 보니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주변에서 놀라워하는 것이 꽤 달콤한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습니다. 기업에 취직한 선배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20대 초반다운 생각이지만) 멋진 옷 입고 사원증을 만지작 거리며 커다란 건물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특이한 이력 탓에 고비가 있었지만, '무엇이든 고생 끝에 결국 해 내는 아이'라는 주변에서 만들어 준 이미지를 어느 순간 사실인 듯 믿었던 저는 무수한 실패 끝에 기대했던 극복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첫 월급을 타고 부모님과 동생에게 선물을 했던 날, 조금은 씁쓸했던 마음이 기억납니다. 스스로 대견해했던 저의 결단력 역시 좋은 회사에 가서 부모님 어깨에 단단한 뽕을 얹어드리고 싶었던 못난 맏딸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대단했던 것은 그때조차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지'라는 반항기 섞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이거면 됐다. 일은 다행히 싫지 않고, 엄마 아빠는 내 덕에 인생 헛살았다는 허탈감 없으시고, 소개팅 나가면 내 스펙은 그럴싸한 쓰임새가 있으니 된 거지.' 하며 주어진 삶을 또 열심히 살아냈습니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경주를 하듯 나의 30대를 지독한 노력으로 보냈습니다. 일은 전문성이 생기니 더 재미있어졌고 상사들은 소처럼 일하는 저를 늘 욕심냈습니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일을 하면서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 하나하나까지 온 정성을 다하니 응원하고 롤모델로 삼아주는 후배들도 생겼습니다. 원래도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감을 어깨 위에 잔뜩 얹어놓고 살았는데, 망한 프로젝트에 혜성같이 나타나 일을 살려내는 능력 있는 일꾼, '포기'를 앞둔 워킹 맘, 여성 리더들의 작은 불씨 같은 희망이 되기 위해 저를 참 악착같이, 닳고 닳도록 썼습니다. 한 번씩 돌아보면 그 시간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다가도 여기까지 나를 지탱해 온 힘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게 흔히 말하는 '중독'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지만요.
지금의 저는 누구나 회사에서 바랄만한 그럴듯한 자리에 와 있고, 제 인생에서 잃은 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좋은 것들'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일의 성과는 빠른 승진으로 연결되었고, 좋은 평판을 쌓아주신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더 이상 나를 증명하려는 고된 노력 없이 안정감 있게 일 할 수 있으며, 이쁘고 기특한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들을 찾아가며 무엇보다 값진 관계를 누리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누구나 '고지'라고 말하는 그곳이 멀지 않게 느껴지고 지금껏 헤쳐왔던 것에 비하면 딱히 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조금 더 시간을 채우면 될 터인데, 왜 하필 지금 저는 인생을 통틀어 거의 전무했던 '자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 걸까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다양한 환경과 상황들에 눈을 돌리게 되고, 가치 판단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일들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게 됩니다. 딱히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는데 자꾸 '불의'를 감지하게 되고, 무슨 일이든 주어지는 대로 흡수하고 결과물을 뱉어내다가 '이 일의 의미와 끝은 뭐지'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나이 마흔이 넘어 그럴싸한 자리를 차고앉아서 '나 계속 이렇게 사나. 뭐가 하고 싶은 거지'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 싫고 무엇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 깨달음이 꼭 필요치도 않은 지금, 왜 하필 지금일까요..
느닷없는 고민은 당연한 듯 느닷없는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야 저란 사람에 대해 진지한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보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글을 써 보는 것입니다. 일관된 주제가 없을 수도 있으나, 표현하고 싶은 다양한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제 자신에게 늘 관대하지 못했기에 '누구나 하는 생각이겠지, 다른 이들은 같은 고민에 대해 더 똑똑한 해답을 찾아내겠지' 라며 막아왔던 생각과 감정들을 조금씩은 쏟아내고 공감도 기대하며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