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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현 Aug 21. 2022

별 욕심은 없지만 잘 살고 싶어

독기 작렬 야심만만한 사람만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처음으로 돈이란 걸 벌어본 그날부터 어딜 가든 먹고 살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첫 아르바이트는 몇 번의 낙방 끝에 찾아낸 연세대학교 내 식당의 설거지 아르바이트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손이 모자라지 않아서, 나같이 방학 중에만 반짝 벌고 그만둘 사람은 일할 곳을 찾기가 마땅치 않았다. 장기로 일하기 어렵다는 말을 전하면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안색이 변했다. 물론 오래 일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그만둔다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가까운 동네 사람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설거지 아르바이트는 어마어마한 양의 접시가 대차에 실려오면 그걸 받아서 음식물을 버리고, 가볍게 씻어내 식기세척기에 요령 있게 집어넣은 다음 나온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진열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앞 뒤를 몇 번이고 오가며 움직여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일하고 일주일 만에 정직원 제의를 받았다. 돌도 씹어먹는 여고생을 막 졸업한 나의 피지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이 일하는 그 누구도 내가 연세대 학생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거다. 물론 제의는 거절했지만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다음 아르바이트는 고모님의 소개로 일하게 된 농산물 박람회의 판매원이었다. 창녕군 부스에서 양파즙과 양파 국수를 팔았다. 판매 개시 후 몇 시간 만에 완판을 했다. 그날 처음 만난 담당자님은 너무 일찍 물건을 다 팔아 할 일이 없어진 나를 데리고 부스를 돌면서 간식을 사 주셨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길을 멈춰서 물건을 보다가, 지갑을 연다. 정말 직관적이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다음 치과 접수원 아르바이트. 선생님께서 간호조무사 시험을 보고 본격적으로 일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이때 잠깐 진로가 변경될 뻔했다.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


어딜 가든 일이 즐거웠다. 뭘 하든 먹고살 순 있겠다 싶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직업에 귀천을 안 따지고 돈만 벌 수 있다면 일은 가리지 않는' 이 성격은 나중에 내 인생을 크게 때리게 된다.


아무튼, 인생이 은은한 잔물결 같았다. 별 불안도 없고, 성취욕도 없고, 욕심도 없었다. '쟤는 기껏 귀하게 낳아줬는데 어쩜 저리 욕심이 없는지 몰라.' 어머니는 날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셨다. 좋으면 좋고, 말면 말고.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뭐라도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태평한 사고로 인생을 이어갔다. 


그런 내가 지금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니 그때의 내가 보면 뭔가 인생에 큰 일이라도 난 줄 알았을 거다. 미리 말해두지만 별일 없었다.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거나, 날 차 버린 애인이 더 성공했다거나, 갑자기 집이 폭삭 망했다거나 하는 그런 인생의 큰 지표가 될 만한 사건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시작 또한 별 볼 일 없었다. 그냥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갓생이란 뭘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갓생'. 그 단어는 마치 열반이나 부활 같은, 나 같은 범인은 결코 닿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무언가 같았다.

매일 공부하고, 사람 만나고, 운동하고, 자기 계발하고, 요새는 미라클 모닝이니 뭐니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또 뭘 한단다. 저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인 건가? 다른 형태의 자기학대가 아닌가? 공포 반, 경외 반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어느 날이었다. 누워서 배 벅벅 긁다가 아 넷플릭스도 더 이상 볼 거 없네, 왓챠로 갈아탈까, 하던 그 순간에 아, 갓생이란 놈을 한번 살아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알면 뒷목을 잡으시겠지. 내 인생의 전환점이란 놈은 고작 그 정도의 계기였다. 뭔가 드라마틱한 사건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인생이란게 사실 별 거 없다.

남들이 저렇게까지 힘들게 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아니 뭐 이유야 많겠지. 높아지는 노인 빈곤율을 대비해 미리 노후대비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꿈이 있으니까,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뭐 그런 것들. 아직 철이 없어서인지, 그런 조급함은 그렇게까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그들이 하는 일을 흉내라도 내 보고 싶어졌다. 그 어떤 불안함도, 조급함도, 독기도, 야심도 가지지 않은 나는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분명 이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더 많을 거다. 세상이 다 독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닐 터였다. 사실 대부분 불안감이 등 떠밀어서 어찌어찌 비틀비틀 나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다. 남들이 하니까 얼떨결에 이것저것 해보지만, 조급함에 시작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서툰 사람들. 나는 그렇게는 되지 않기로 했다. 조급함과 불안함에 억지로 내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닌, 차근차근 하고 싶은 일부터 찾아 착실하게 무언가를 쌓아나가야겠다. 그게 바로 '갓생'으로 이어지는 길 같았다. 


황새가 되려고 뻗은 걸음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 그릇은 뱁새였다. 하지만 다른 뱁새들보다는 더 빠르고 넓게 뛰기로 했다. 가랑이는 약간 찢어질지언정, 다른 뱁새보다야 조금 넓은 보폭으로 종종종 뛰어갈 있겠지.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좋아, 이제 발은 떼었다. 열심히 한번 살아보자. 그렇게 새 마음 새 뜻으로 일어난 내 앞에 하나의 장벽이 생겨났다.


"... 근데 뭐해먹고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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