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 대신 평화

by 엘레강스두인사

짜증 대신 평화를 보낸 날

일 년 만기된 예금으로 제2금융권 은행을 찾았다. 원래는 한산한 곳인데 연휴의 시작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나는 맡긴 열쇠도 찾아야 하고, 아이들 밥도 챙겨야 하고, 오후 일정도 있었다. 이미 마음은 분주했다. 내 순번이 되어 창구 의자에 앉았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되었다. 내 마음은 지금 호랑이를 만난 토끼 같은데, 창구의 은행원은 앳된 얼굴의 거북이 걸음이었다. 그는 일을 하다 자주 멈추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 무언가를 묻는다. 그냥 예금 재예치인데, 해마다 오면 십 분이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는 걸까.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은 이미 다 일을 보고 돌아갔고, 나만 이 자리에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내 얼굴이 굳어졌다. 마음 한쪽에서 조급한 아이가 속삭였다. “언제 되냐고 물어봐.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언제 되나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때 잠깐 멈췄다. 이제 막 신입인 듯한 저 사람은, 어쩌면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지루해지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라도 가져올 걸 후회하다가 핸드폰에 저장해둔 전자책이 떠올랐다. 읽기 시작하자 기다림은 덜 날카로워졌다. 같은 시간이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느려졌다. 마침내 일이 끝났다. 은행원은 조심스럽게 주민등록등본이 두 장인데 하나는 가져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두 장 다 가져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고,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나가려는데 “잠시만요” 하며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새해 선물이었다. 선물을 받아서 기뻤다기보다, 내가 내 조급함에 끌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고마웠다.


최근 읽은 책에서 진짜 우아함은 무너지려는 순간에 드러난다는 문장을 만났다. 마음이 두 조각 난 날에도 평소처럼 인사하고, 공들여 말하는 태도. 그날 은행 창구 앞에서 나는 내 안의 조급한 아이를 먼저 받아주었다. 왜 이렇게 급하니 묻자, 요즘 자꾸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그 아이를 조금 이해해주자 타인을 이해할 여유도 생겼다.


우아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멈추고 한 번 숨 고르고, 나의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 조급하구나 하고 인정하는 순간, 그 감정은 나를 끌고 가는 주인이 아니라 곁을 지나가는 손님이 되었다. 아주 작은 선택이었지만, 그날 나는 짜증 대신 평화를 하나 보낸 셈이었다. 그래서 조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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