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대신 나

by 엘레강스두인사

아이들과 집 안에서 뒹굴뒹굴하다가 갑자기 떠난 여행이었다. 제주도로 갈까 하다가 렌트카도 알아봐야 하고 공항까지 가는 것도 번거로워 그냥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가기로 했다. 부산은 늘 미뤄두던 곳이었다. 차로 가기엔 멀고, 가족이 다 움직이기엔 교통비가 아까워 계산기 앞에서 접어두던 여행지. 가성비로는 늘 제외되던 곳이었다. 그래, 이번엔 그냥 가자. 바다나 보고 오자. 남편은 회사로 빠지고 딸과 아들, 셋이 움직였다.


가족과 여행을 가면 편안하다. 방이 어질러져도 괜찮고, 일정이 틀어져도 괜찮고, 밥을 먹다 침이 튀어도 아무렇지 않다. 음식도 네 것, 내 것이 없다. 먹고 싶으면 그냥 가져다 먹으면 된다. 나와 너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그래서 안전하다.

그 안전한 자리에서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던 얼굴을 만난다.


KTX에 앉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 “등록금 납부 안내.” 원서만 넣으면 되는 대학이었다. 차라리 다 떨어졌다면 마음이 덜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재수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들은 공부에 뜻이 없고 아마도 이 대학을 다닐 것이다. 인강을 듣겠다며 책을 샀지만, 그게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내 표정을 읽고 건넨 제스처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문자를 보며 승차권이 무슨 낮은 등급표를 들고 있는 사람마냥 기분이 나빠졌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과 카페, 반짝이는 바다빛 앞에서도 나는 자주 딴생각을 했다. 식탁 위에 남은 쓰레기가 먼저 보이고, 오고 가며 해 맑게 이야기하는 아들의 학교 생활 이야기에 나만 가슴이 철렁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뒤에 서 있는 장면이 혼자서 선명해진다. 군대는? 직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머릿속은 이미 바빠진다. 나는 조용히 아들을 재고 있었다.


이 불안은 오늘 처음 시작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들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갑자기 나에게로 향한다.

기억은 아주 오래전으로 내려간다. 일곱 살, 머리가 엉켜 있고 콧물이 말라붙어 얼굴이 얼룩져 있던 아이가 질퍽한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 학교 선생님이 지나간다. 아이는 먼저 움츠러든다. ‘내가 좀 초라해 보이겠지.’ 잠깐 멈칫하는 시선. 입술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훑는 눈. 나는 그 눈을 안다. ‘저 애 왜 저래. 형편없군’

그런 표정이었다. 그때 다른 교사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oo이 동생이래.”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다가와 묻는다. “너가 oo이 동생이니?”

돌이켜보면 그날 처음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나를 먼저 작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눈빛이 그렇게 깊이 들어왔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아들을 바라보는 이 눈빛 역시, 그때 배운 방식일지 모른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또 부동산 사이트를 넘긴다. 사려고 했던 집들은 모두 올라 있다. 화면을 닫으며 괜히 짜증을 낸다. 보지 않으면 될 것을. 나만 제자리에 서 있는 기분, 아니, 나만 뒤로 밀려난 기분이 든다. 그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겹친다. “너는 그것밖에 못 되니.” 그 말은 오래전에 사라졌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말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아들에게까지 건네려 한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바다를 보러 갔고, 맛집도 찾아다녔다. 하지만 바다도, 맛집도, 아들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본 것은 내가 어릴 때 써두었던 대본을 꺼내 그대로 역할 수행만 열심히 하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 역할을 이제는 그만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나를 보았다.


나는 바다를 보러 갔다가, 여러 겹의 나를 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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