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인연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과 같다. 정말 소중하고 결정적인(?) 인연은 서서히 등장했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위치를 켜면 단번에 밝아지고, 끄면 단번에 어두워지는 것처럼 확 나타났다 확 사라진다. (물론 예전에는 기술이 덜 발전해 불이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고, 지금도 일부러 멋들어지게 서서히 밝아지도록 한 조명이 있지만 아무튼...) 인연이란 게 내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노력해서 서서히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로또처럼 ‘꽝’ 아니면 ‘당첨’이다.
결국 인연이라는 건 꽤나 운에 달린 일 같다. 일단 인연이 생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노력이나 의지로 잘 키워가고, 때로는 망치고 하는 것이겠지만 인연 자체를 ‘만나’는 건 글쎄...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일까. 잘 안 되니까 ‘연(緣)’이란 조금은 미묘하고 명쾌히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가 쓰였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두 가지 면에서 마음이 편해진다. 첫째, 일에서건 사랑에서건 내가 별다른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내 노력이나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그냥...아직까지 켤 만한 스위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일에서건 사랑에서건 지금 좋은 인연들이 있다면, 또 앞으로 만난다면 그건 정말 큰 행운이고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일이니 많이 기뻐하고 감사하면 된다.
물론 씁쓸한 면도 있다. 인연 자체를 ‘만나지 못한’ 경우엔 내가 그 인연을 통해 얻는 것은 물론이고 인연을 좋게 가져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도 없는 거니까. 그래도 어쨌든 대단한 인연이 없음에 실망하지 않고, 작더라도 연락 닿을 누군가 있다는 것에 고마워할 수 있다. 인연이란 게 그리 쉽게 잡을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마흔 살이 넘어 난생처음으로 회사 연수로 미국에서 살아보고 있다.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없이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서 일까. 오늘 하루 나와 ‘엮인’ 사람들 모두가 제법 영향을 미친다. 버스를 타면서 ‘헬로’를 외치는데 반갑게 같은 인사로 받아주는 기사님을 만나면 별 것 아니라도 기분이 좋고, 반대로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데 내가 물어보는 말이 어색하다고 옆 계산대의 동료와 수다를 떨며 바코드만 찍어대는 직원에게는 상처를 받는다.
미국에 간다 하니 많은 동료와 지인들이 ‘좋은 인연을 찾아봐라’며 덕담해줬다.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애인이나 배우자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는 농반진반의 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인연을 못 만난 건 아닐 테지.
‘인연’. 이제 나는 여기에 엄청난 의미를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만나지면 인연이고, 아니면 아닌 거다. 한편으론 만나서 인사하고 밥 먹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소소한 인연일 수도 있다. 거기에서 기쁨을 찾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게 남은 인생에 오히려 중요한 마음가짐이다. 세상에 ‘인(人)’은 많아도 ‘연(緣)’은 드물다. 연이 많은 게 정상인 게 아니라 원래 연은 엄청나게 드문 거다. 행운처럼 내게 닿은 좋은 연을 소홀히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닿지 않은 연을 나는 복도 참 없지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다.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많은 것들을 접한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보다 이미 연을 맺은 부모님, 동생, 몇 안 되는 친구들, 종종 생각나는 동료와 지인들이 오히려 더 각별하게 생각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