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갑과 을. 모든 사람은 어떤 때는 갑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을이다. 얼마 전 미국 나파밸리에서 한 행사에 초대받았는데 (말 안 통하는) 미국인들도 많고 식사시간도 길어서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행사에 초대해 준 나이 지긋한 지인이 ‘당신이 갑이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라며 나지막이 꾸짖었다. (결국 그 행사에 참여했고 즐겁고 소중한 경험을 했다) 당시 나는 울컥했다. 영어가 자신 없어서, 길고 긴 식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가고 싶지 않다고 용기 내서 솔직하게 말한 건데, 갑이라니!!
곰곰이 생각해 봤다. 갑처럼 산 적이 있나? 정말? 사실 핸드폰 문자나 카카오톡 사용을 보면 누가 갑인지 답이 나온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길고 정성스럽게 보내고, 그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만사 제쳐두고 몰던 차를 갓길에 대고서라고 즉시 답을 한다면 그건 내가 을이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는데 내가 편할 때 답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주 짧게만 답을 한다면 그건 내가 갑이다.
나는 때때로 기분이 조금 상한다. 직장 상사나 업무와 관련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내가 아무리 길고 긴 문자를 보내고 보지 않거나, 보고도 답하지 않거나, 답하더라도 아주 짧게 답한다. 그래도 나는 다시 주절주절 예의 바르고 치렁치렁한 긴 답글을 보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 역시 큰 틀에선 다르지 않다. 허물없는 친구나 가족이거나, 후배나 나보다 연차가 낮거나, 소위 내가 아쉬울 것 없는 업무 관계의 사람들에게 연락이 오면 즉각적으로 답을 하지 않거나, 윗사람에게 보내는 분량(?)의 정성스러운(!) 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것도 갑질이다. 상대는 ‘기체후일향만강~~’을 포함한 여섯 줄 가량의 문자를 보내왔는데, 나는 ‘ㅇㅇ’라고 보냈다면....내가 갑이고 갑의 행동, ‘갑질’을 한 거다.
누구나 성향이 있고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절박한 사람은 아무리 성향과 성격에 맞지 않아도 웃고 굽실댄다. 반면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까짓 것 한번 웃어줘도 될 텐데 쉽게 웃지 않고 여러 번 고개를 끄덕여 공감해 주지 않고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씁쓸한 건 그 사람도 자신에게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비위를 맞추고 웃어대고 굽신 댈 게 틀림없다는 것.
하는 일, 나이, 상황 등에 따라 누구나 한편으론 갑이고 한편으론 을이 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을’일 때의 나를 생각하고 ‘갑’일 때의 나를 조금 더 친절하게 다듬을 순 없는 걸까. 내가 당한 것, 내가 겪은 스트레스를 나도 똑같이 나보나 을인 누군가에게 풀겠다...이런 자세는 곤란하다.
2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때그때마다 누가 갑인지, 누가 을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때그때마다 십중팔구 갑은 갑처럼, 을은 을처럼 행동한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말이다. 갑은 갑인 것을 알고 을은 을인 것을 아는 상황에서 갑이 조금만 더 ‘갑처럼’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피곤해도 아랫사람에게 웃어주고, 자신보다 상황 파악이 덜 돼도 무안 주지 말고, 귀찮아도 공감해주고, 귀에 들어오지 않아도 귀 기울여 주고(주는 척이라도 하고)...그게 상대 ‘을’에게 얼마나 큰 안도와 희망과 기쁜 일인지 과연 ‘갑’은 알까.
베풀자. 너그러워지자. 친절해지자...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내가 나의 ‘갑’인 여러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제안하고 문의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려고 의식하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결국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일 수 있는 건 '갑'이다. '을'은 어차피 친절하고 낮은 자세일 수밖에 없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갑인가요? 그럼 상대방을 배려하세요. 그의 입장에서 한 번 만이라도 생각해보세요. 잘 생각이 안된다면 당신이 그토록 '을'이었을 때의 압박과 긴장과 초조함을 떠올려 보세요.
베푸세요. 너그러워지세요.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어요.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인생 뭐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 지고 갈 큰 짐을 조금이라고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친절과 배려를 베푼다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