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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에 대해 (2) - 모두가 하루를 힘들게 살아낸다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by 제인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옳음과 친절함 중에 하나를 선택할 때는 친절함을 선택하라. 영화 <원더>에 나오는 대사다. 이걸 가지고 그럼 모든 게 다 좋은 게 좋다는 거냐, 불의의 상황에서도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라는 거냐, 나름의 논란이 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불의나 비리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사실 ‘친절’은 정말 정말 매우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사람 개인의 성향이 다를 수 있고, 남자와 여자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에게 친절은 살면서 그 어느 가치에 뒤지지 않게 중요한 덕목이다.


일본에는 속마음과 본심을 일컫는 ‘혼네(本音, ほんね)’와 사회적인 규범에 따라 겉으로 내보이는 ‘다테마에(建前, たてまえ)’란 단어가 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과도하게(?) 친절한 일본인의 특성을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때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그 친절함이 혼네면 어떻고 다테마에면 어떤가. 혼네가 아니어도 좋으니 다테마에라도 누군가의 친절함이 큰 도움이 될 때가 분명 있다.


미국에 처음 정착하고 나니 ‘친절함’이 진실로 절실했다. 낯선 이방인, 다시 볼 일 없는 외국인, 영어도 원어민보다 못하는 동양인에게 친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은 누군가 만만한(?!) 사람에게 스트레스나 왜곡된 감정을 풀려고 한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도 소위 ‘씹는’ 사람들이 많았고, 분명 훨씬 편하고 돈이 덜 드는 방법이 있는데도 알려주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알면서도 언어적·문화적인 제약 때문에 그냥 손해보고 만다...는 기분으로 넘어간 때가 많다. 문제는 경제적 손실보다 마음의 상처다.

반면 생각지도 못했는데 먼저 친절하게 인사해 주는 사람들, 그거 말고 이런저런 선택지도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들, 너의 영어가 나의 한국어보다 훨씬 훌륭하니 괜찮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떠나 심적으로 그날 하루의 나에게 엄청난 힘이 돼 줬다.

난 1년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으로 때때로 우리는 ‘까칠함’이 갑이자 지적 우월함의 척도고 ‘친절함’은 을이자 해당 정보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않는 사람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굳이 내가 아쉬울 것도 없는 상대를 배려할 필요도 없고 그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잡혀 있다.


그 대신 ‘친절함의 용량’을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상사 등 ‘갑’에게 쏟는다. 참 씁쓸한 일이다. 후배나 부하, 나에게 뭔 갈 팔아야 하는 협력사, 소위 ‘을’이란 상대에게 친절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왜 그럴까. 같은 상황에서 말이나 행동을 친절하게 하는 데 큰 노력이나 비용이 들어가나? 그렇게 하면 자신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나?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힘들게 살아간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저마다의 힘든 점, 괴로운 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보이는 점, 그럼에도 차마 말 못 할 일들을 안고 살아간다. 연 수십조 원을 벌어들이는 재벌 회장님도, 이제 막 10대에 접어든 청소년도 괴로움의 크기는 어느 쪽이 더 큰지 결코 남이 재단할 수 없다.

왜 잠시, 아주 약간의 노력으로 상대에게 친절할 수 있는데 그걸 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다테마에’인 친절이 누군가에겐 ‘혼네’ 못지않은 큰 힘이 되고,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다테마에든 혼네든 그게 무슨 상관이가. 지위가 높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웃긴 말이지만) 지식이 많은 사람은 친절하면 자신의 강점이 퇴색되는 건가?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본다.

얼마 전 50대가 눈앞인 지인 선배가 말했다. ‘난 까칠한 사람은 싫어’.

절대적으로 동감이다. 권력자, 소위 ‘강’인 사람 앞에 까칠한 것이라면 관계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까칠하다. 슬프고 씁쓸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까칠해서 무슨 대단한 우월한 감정을 맛보겠단 건가. 친절하자. 진심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름의 힘듦과 어려움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나의 말 한마디, 나의 얼굴 표정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친절해지자. 인생 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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