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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11. 2022

싱글, 안 좋아요 (1) - 무섭다 진짜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싱글이지만 한 번도 싱글로 살라고 주장(?)해 본 적이 없다. 후배나 동생들에겐 늘 ‘빨리 좋은 짝은 찾으라’고 했다. 싱글들은 나이가 들고 조직에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체면과 자존심 때문인지 혼자 살아 힘든 점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들도 또래의 친구들에겐 절절한(?) 넋두리나 하소연을 늘어놓곤 한다.


싱글은 편하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도 없고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적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마음 가는 걸 그냥 하면 된다. 명절 연휴에 소파에 누워 영화라도 볼 때면 ‘와, 이거 너무 좋은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익숙한 내 나라를 떠나 살아보니 오래 잊힌 유물이 모래 속에서 발견되듯 싱글의 단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 마디로 싱글은 외로운 것보다 ‘힘들고’ ‘불편하다’.

외롭다, 슬프다는 감정도 힘들고 불편한 상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뒤에 느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과거에 전쟁과 기아 등을 겪은 어르신들이 외로워요, 삶이 허무해요 같은 얘기를 하면 ‘아직 배가 덜 고파봐서 그렇지’ ‘복에 겨웠다’고 하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그간 겪은 심정을 살풀이를 하는 기분으로 적어본다.

      

▶ 신변의 위협

오지도 아니고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무슨 위협이냐고 하겠지만 말 그대로 혼자는 무섭다. 꼭 총기를 지진 나라라서가 아니라 ‘싱글 이방인 여자’는 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약자다. 언어의 한계가 있고, 자국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아는 사람이 없고, 물리적으로도 가장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좀 과장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당장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대상이 외지에서 온 싱글 여자다.

처음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미국은 언제라도 유지관리직원(maintenance)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워낙 사생활을 중시하는 나라라 아무리 렌트라고 해도 임차인의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노크를 한다든지 미리 고지를 한다든지 절차는 있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거나 법적 의무일정인 경우엔 기본적으로 아파트 유지관리직원은 문을 따고 ‘남의 집’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거다.

      

나의 경우 비자 문제로 입주가 예정보다 늦어졌고 아파트 측에선 정보 공유와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나 보다. 입주 둘째 날인가 화장실에서 편한 차림으로 양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덜거덕 큰 소리가 나더니 흑인 남자가 불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 기암을 했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고 뭐라고 소리쳤던 거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져서 기억도 안 난다. 같은 상황이라도 알고 겪는 것과 모르고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이깨나 들어서 허술한 옷차림에 비명까지 질러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처참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직원은 아직 빈 집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이후에도 아무리 ‘나에게 허락을 받고 와달라’고 해도 몇 번이나 유지관리직원이 흙발로(신발을 도통 안 벗는다) 들이닥쳤고, 그때마다 당황스럽고 긴장돼 사람이 간 뒤에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회사 일을 끊고(?) 고쳐보자고 했던 불면증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외출한 동안에도 ‘지금 또 누가 집에 들어간 거 아냐?’ 걱정이 됐고, 밤에 누워서도 잘 수가 없었다. 문밖 복도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면 누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신경이 예민해졌다. 급기야 ‘이런 상태라면 언제든 무슨 일을 당할 수 있겠구나’란 생각에 이르러 비싼 돈 주고 내가 여기서 왜 이런 맘고생을 해야 하나,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거리를 걸을 때도 무서울 때가 많다. 이건 광활한 땅에서 아직 차 없이 버스타고 걸어다니는 내 상황이 문제를 키운 게 맞다. 한적한 곳에서 노숙자나 험악한 차림의 남성들과 마주치거나, 단 둘이 걷거나, 낯선 누군가 뒤에서 계속 따라 걷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높아진다.

실제로 남성 몇 명이(모두 내 조카 벌쯤 돼 보였다) 계속 말을 걸며 따라온 적이 있었다. 순수한 호감이 아니라 동양 여자에게 돈을 뜯어내거나 다른 나쁜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심지어 택시 플랫폼 업체 기사가 나를 태운 뒤 어눌한 영어를 듣고는 자기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며 “인생 별거 있냐” “(시민권자 아닌)외국인끼리 놀아보자” “빨리 내 번호를 저장해라” 압박한 경우도 몇 번 있다.    

 

▶ 긴장은 나의 동반자

하다하다 해충 문제도 날 우울하게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화단이 있는 아파트 1층에 살아서 이런저런 곤충에 익숙하다. 벌레도 잘 잡는다. 무엇보다 깔끔한 성격이라 매일 집을 닦는 데다 부끄럽지만 별다른 요리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맞은편 집에서 바퀴벌레가 넘어왔다.

젊은 유학생이 사는 그 집은 밤늦게까지 파티하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아침이면 복도 문밖에 먹다 남은 피자상자과 과자봉지가 그득했다. 어느 날 외출했다 오니 화장실 거울 앞에 커다란 바퀴벌레가 떡 하니 있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국 바퀴벌레는 몸집도 크고 붉은색이다) 며칠 뒤엔 현관문 아래 틈 사이로 바퀴벌레 씨가 유유히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현장을 목격해 처단하고는, 현관 틈 사이를 인테리어용 테이프로 막아버렸다.

아파트 관리소에 너희 이러면 집값 떨어진다, 맞은편 집이 더러워서 바퀴벌레가 넘어오니 철저히 방역해달라고 요구했더니…역시나 예고도 없이 흙발로 우리집에도 들어와 약을 치고 갔다. 흑흑. 이쯤 되면 벌레도 무섭고 사람도 무섭다.


연약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어린 나이도 아니지만 무섭다는 말 외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무서움이나 걱정거리를 겪은 그 순간에 말하면서 긴장을 풀 상대가 없다. (와인아 고마워)

한국에서 함께 온 연수자들도 있고, 이곳에서 알게 된 지인도 있지만 아이가 있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거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몇 달이 지나니까 미국 환경과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자주 다니는 곳은 한결 마음이 편해져서 그게 행동이나 표정에도 묻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도 기본적으로 나의 이동과 생활, 여행은 모두 혼자일 거다. 주변에선 ‘무조건 지금을 즐기라’는데 늘 쉬운 것만은 아니다.

사람마다 성격이나 성향 차이가 크겠지만, 혼자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이 생리를 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늘 긴장한 탓에 근육통이나 몸살을 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엔 ‘어이구 약한 척 하긴. 과장도 심하지’라고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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