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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08. 2022

우리에겐 ㎝보다 인치가 필요해요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A 씨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4시면 퇴근한다. 게다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주 4일이다. B 씨는 똑같이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고 주 5일 일한다. 누가 더 스트레스일까. 당연히 B겠지!


그런데 ▶A는 출근하자마자 쉴 새 없이 ‘오늘 몇 시까지 일을 다 끝내야 한다’ ‘안 돼도 어떻게 해서든 되게 해 보라’ ‘그거 안 되면 큰일 난다’란 압박을 받는다. 반면 ▶B는 일에 주어진 시간이 한결 넉넉하다. 일마다 담당자가 뚜렷하고 절차와 규정이 엄격하게 정해져서 그걸 단축하거나 뛰어넘어 ‘더 빨리 해내라’ ‘원래 안 되는거 아는데 되게 해 보라’는 요구가 없다. 자, 이제 누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까.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B처럼 일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할 거다.            


이전 글에서도 친절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봤지만, 결국 친절은 여유에서 나온다. (엄마는 늘 “여자가 짜증을 낼 때는 몸이 힘들다는 신호다”라고 했다) 아무리 선하고 배려심 많은 성품으로 타고나도 긴장과 압박을 반복하며 산다면 진이 빠지고 몸도 마음도 여유를 잃을 수밖에 없다. 당장 ‘내일은 또 어떻게 해내지’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걱정이 엄습한다면 눈앞에 아무리 좋은 풍경이 펼쳐지고 맛있는 식탁이 차려져도 타인에 대한 배려나 웃는 얼굴, 상냥한 말과 태도가 나오기 어렵게 돼 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정말 싫었던 점이 조금씩 괜찮게 느껴진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미국의 ‘일반적인 근로 문화’는 B에 가깝다. 당연히 예외는 많다. 어느 나라든지 업종의 특성상 병원이나 소방서, 로펌, 투자은행, 언론사 등 분초를 다투며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도 많고, 자영업이든 대기업이든 학문이든 열정과 절박함과 경쟁에 밤이고 낮이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주목하는 건 일반적인 문화, 정확히 말하면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이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 예를 들어 한국에선 ‘그 일은 하루 만에 되는 게 정상이야’ 라고 생각하고, 미국에선 ‘그 일은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걸리는 게 정상이야’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차이 말이다.      


유럽보다는 덜하지만 미국에서 식당에 갔을 때 무안한 경우가 있다. 한국사람 기준으론 식당에 가서 자리에 앉았으면, 직원이 다가와야 마땅한 시간이란 게 있다. (당연히 바로 와야지) 그리고 주문을 받아갔으면 음식이 나와야 마땅한 시간이란 게 있다. 한 5~10분? 그런데 이게 내 예상보다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손을 들고 ‘여기요!’ 식으로 알리거나 ‘왜 아직도 음식이 안 나오지?’ 직원이나 주방 쪽을 계속 바라보게 마련이다.      

반면 미국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자리에 앉고 나서 5분쯤 있다가 직원이 오는 게 당연하고, 주문 뒤에 음식이 수십 분 뒤에 나오는 게 당연한 거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인내심을 가지고 ‘참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것,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실제 미국은 어떤 장소에 가서 줄을 선 뒤 입장하는 시간, 서류를 신청해서 심사하는 기간, 운전 면허증이나 신용카드가 발급돼 집으로 배송되는 기간 등 모든 게 한국보다 길다. 속도가 느린 거다. 아무리 간단한 서류라도 최소한 영업일 기준으로 5일은 기다리는 게 기본이다. 고작 이틀 사흘 정도 지나서 '왜 안와요?'라고 묻는 사람이 이상하고, 무례한 거다.


왜 느릴까. 미국인이 한국인보다 멍청해서? 대학 등 고등교육 경험이나 ‘빨리빨리’ 일하는 숙련도, 노하우는 확실히 한국 사람이 나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론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하루 만에 하는 게 당연한 한국과, 일주일 만에 하는 게 당연한 미국.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경쟁력이 높을 거다. 행정 서비스만 해도 한국에 와서 감탄하고 감동받고 가는 외국인들이 많다. 미국 기업들도 한국 직원들의 일처리 속도에 ‘이걸 이렇게 빨리 해냈단 말이야?’ 엄지 척한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선 어떤가. 자영업처럼 본인의 사업체거나,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미쳐있는 사람이면 상관없다. 하지만 대다수 직장인의 경우 한국의 ‘빨리빨리’ ‘안되면 되게 하라’는 근무 문화는 스트레스의 큰 원인이 된다. 한국에서 ‘인형에 단추 눈알 붙이는 일 하고 싶다’ ‘봉투에 풀 붙이는 일 하고 싶다’는 식으로 말하는 직장인들을 많이 봤다. 내게는 그 말이 그 일이 쉽고 만만해서 좋다라기보다 ‘시시각각 예정에 없이 터지는 일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를 그만 받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아마 그 의미가 맞을 거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인식이 ‘그거 하루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여기는데 김 과장 혼자 ‘일주일은 주셔야 합니다’ 라고 해봤자 그 사람만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이 된다. 사회의 인식도 ‘그래, 그건 일주일은 걸리겠네’ 라고 돼야 직원도 회사도 고객도 아무 불만 없이 지나가는 거다. 미국이 딱 그렇다. 그리고 그런 인식과 문화가 개개인에게 여유를 주고, 그 여유가 친절과 편안함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30시간을 해봤자 하루에 주어진 일의 양, 해내야 당연한 속도가 줄어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짧은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 더 가슴 조이고 발을 동동거리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대기업에 다니며 연봉 수억 원을 받아도 퇴직하고 나면 ‘허무하다’라고 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석양처럼 인생이 저물어갈 때쯤 뭘 하고 산 지 모르겠다, 열심히 살았는데 기억에 남는 게 없다고 한다. 그들은 실제로 초인적인 집중력과 노력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처리하고, 안 되는 일을 어떻게 해서든 되게 하며 매 순간 스트레스를 받고 치열하게 살았을 거다. 하지만 그러느라 하루하루 ‘여유’를 갖지 못했고, 물리적으로 휴식이나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으며 심적으로도 주변에 친절함과 상냥함을 나누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그들, 아니 우리 잘못이 아니다.     


미국은 주요 국가 중에선 유일하게 별난 단위를 쓴다. 인치·마일·피트·갤런·온즈·야드·에이커 등…. 미국에 온 지 석 달이 됐지만 어색하다. 하지만 이 나라에선 수백 년 넘게 너무나 당연한 단위들이다. 1인치는 2.5㎝, 1마일은 1.6㎞, 1온스는 28.3g, 1갤런은 3.8L. 그러고 보니 모두 한국이 쓰는 기본 단위보다 크다.

헷갈리게 혼자서 국제단위계(SI)인 미터법을 따르지 않는 건 불만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가 돌아가는 속도,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모두가 용인해주는 기간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의 기본단위, 기준 단위가 좀 더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여유와 친절, 인간다움은 거저 샘처럼 솟아나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여유로우면 자연히 갈등과 마찰을 피하고 친절과 배려를 베풀려 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맛보고 싶어 한다. 그게 모여 ‘인생은 아름답고 살만한 것’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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