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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03. 2022

4000명 커플 사이에서 ‘사랑’을 생각하다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연수 중인 대학이 방학이라 난생처음 크루즈 여행을 해봤다. 미국 남쪽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항구를 출발해 쿠바와 미국 사이에 있는 섬나라 바하마(미국령인 줄 알았는데 영국령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서 처음 도착한 게 바하마다)를 거쳐 다시 마이애미로 돌아오는 4박5일의 일정이었다.


육지와 고립된 게 섬이라면 이 거대한 선박도 섬이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승객만 4300명 정도고, 승무원까지 하면 5000명이 훌쩍 넘을 거라고 했다. 떠다니는 작은 마을인 셈이다.

     

팩트체크 없이 경험과 짐작으로만 볼 때 승객 구성은 ▶유치원~초등학교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 30% ▶60대 이상 효도관광 온 노부부 30% ▶커플(특히 사귄 지 얼마 안 된) 30% ▶친구끼리 온 사람들 및 기타 10% 정도였다.

친구는 배 위에서 잭 도슨(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이 만난 운명의 사랑)을 찾으라고 했지만, 초장부터 ‘음…이건 아니로군’이란 느낌이 강하게 왔다. 과장이 아니라 4박5일 동안 배 구석구석을 쏘다녀봤지만 ‘덜렁 혼자’ 온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혼자 여행하는 게 드문 일이라기보다 크루즈 여행의 콘셉트나 프로그램 자체가 가족이나 커플에 최적화돼 있기 때문인 듯하다.

      

육지와 고립된 4박 5일. 선박에 갇힌(?) 4000여명과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커플들. 본의 아니게 커플들의 부분이나마 밀착된 생활을 자연스럽게 지켜볼 수 있었다.     


우선 어린 자녀들과 온 부부들은 어느 나라든 비슷하다. 자녀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물해 주고 싶어 온 만큼 하루 대부분을 아이들과 각종 물놀이 기구가 설치된 수영장에서 보내고 때가 되면 식당에서 식사를 챙기고, 해가 저물 때쯤이면 아이들을 씻기고 하느라 정신없고 힘들어 보였다. 물론 엄마 아빠도 그 시간을 함께 즐기며 추억을 쌓는 것이니 힘들어도 행복한 한 때로 표현하는 게 맞을 거다.     


노부부들은 흥미롭다. 둘이서 온 경우도 있고,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 커플과 ‘쌍쌍 파티’로 온 사람들도 꽤 많다. 이들은 선박의 포식자(나쁜 의미가 아니다)다. 두려울 게 없달까.

언뜻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미국·유럽·남미 등의 노부부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뷔페식당에 와서 식사를 거하게 한 다음 온수풀에 가서 온천을 즐기는가 하면, 가장 명당자리에 놓인 선베드를 차지하고 엄청나게 큰 소리로 웃고 대화하고 태양을 오롯이 즐긴다.

제멋대로라기 보다…오래 살면서 별의별 경험을 다한 만큼 남의 눈치 볼 것도 없고, 딱히 벗은 몸이 부끄러울 것도 없고, 나는 나 좋을 대로 내 맘대로 하고 놀겠다…뭐 이런 강력한 여유로움이다.     

이들은 (아마 서양 사람들이라서) 대부분 풍요로운 몸매를 가졌고, 결코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거대한 몸매에 비해 생각보다 과감한 노출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몸만 봐서는 성별을 잘 알 수 없지만 배가 많이 나온 건 똑같다.

노부부들은 재즈나 음악 공연이 있을 때면 흔쾌히 나와 춤을 추며 금슬을 자랑하는가 하면,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이성 파트너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차차도 추고 건배도 하고 수다도 떨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곤 했다. 저쪽 남자가 내 부인에게 춤을 청하거나, 칭찬을 하거나, 손등에 입을 맞춰도 괘념치 않는 거다. 동서양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이 지긋한 커플이기에 가능한 상황일 거다. 이들은 공연장에서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목소리는 작아도, 배 안의 어떤 승객들보다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자나 애인이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오래 알고 사귀어서 서로 잘 알고 편안하고 믿음이 있는 파트너가 있다는 게 정말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설렘이나 질투, 초조함과 긴장…그 뒤에 이어진 수많은 갈등과 다툼, 그리고 화해와 조정. 이런 단계를 모두 거친 오래 함께 한 가재도구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 순간 갑자기 아무리 멋진 남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주어진다 한들 얼마나 낯설고 부담스러우며...심지어 큰 기쁨과 의미도 없지 않을까. 나는 이미 이런 생각을 하게 돼 버렸다.     


실제로 배 안엔 미혼인 수많은 국적의 젊은 남녀 커플들이 있었다. 남녀가 고립된 배 안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춤추고 수영하고…이 모든 걸 한다니, 그야말로 짜릿하다. 아니나 다를까 승무원들이 그렇게 ‘식사 장소와 쇼핑몰엔 수영복 차림으로 오지 말아 달라’고 했건만, 터질듯한 몸매에 가릴 곳만 가린 비키니 차림으로 나타나는 여성들은 100% 남자친구와 함께 온 젊은 여성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와’하고 감탄하며 봤지만요)


반면 내가 이 짧은 기간 동안 심각하게 싸우는 걸 목격한 커플만 세 커플이다. 한 커플은 대충 여자가 남자에게 ‘니가 여기서조차 이럴 줄 알았다’며 소리를 질렀다. 또 한 커플은 식당에서 내 맞은편에 앉았는데 여자가 아무리 음식을 가져오고 뭐라 뭐라 말해도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도통 먹지도 않고 유리창만 보고 있다가 결국 ‘헤어지자, 시간을 갖자’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하필 크루즈 여행, 그것도 뷔페식당에서 결별 선언을 하다니, 같은 여자로서 너무 잔인하다 싶은 장면이었다.


마지막 커플은 프랑스어를 사용해서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하필 공연 극장에서 말싸움을 시작해서 주위 사람들을 조마조마 불편하게 했다. 남자가 자꾸 여자 이마에 키스를 하려고 하는데 여자는 뿌리치고 하는 걸로 봐서 뭔가 짝사랑이나 사연이 있는 커플인가 싶었다. 혼자 배 안 공연 보려고 온 사람도 있는데 뽀뽀해주려는 남자를 밀치다니 복에 겨웠구나 생각도 들었지만 뭐 , 각자 사정이 있는 것이니….

     

아, 동성 커플도 몇몇 봤다. 옷을 맞춰 입고 서로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알았다. 한 커플은 50대쯤 돼 보이는 남성들이었는데 타인에게 굉장히 적대적이었다. 누군가 자신들을 무심코 바라보거나 심지어 크루즈 스태프들이 '필요한 것 없으신가요' 말 거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 무서운 표정이 서로를 바라볼 때는 그토록 부드럽게 바뀌는 거였다. 사랑의 힘이 저런 건가 싶었다. 우리가 호텔방에 ‘방해하지 마세요’란 팻말을 거는 것처럼 그들은 온몸으로 ‘내 사람과만 있을 테니 누구도 건들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은 쉽지 않다. 관계 맺음은 더더욱 쉽지 않다. 20~30대엔 소위 외모나 직업, 성격이나 인상이 좋아 ‘호인(好人)’으로 불리는 애인이 있는 게 희망사항이었고 그런 짝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럴 확률도 없거니와 그런 멋진 사람이 주어진다 한들 나와 맞지 않거나, 내가 편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적당한 긴장과 설렘은 사랑의 묘미지만 시간이 지나도 편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늘 좋아하는 남자 눈치를 보고 맞추려 했던, 힘은 힘대로 들고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졌던 시절이 생각나 씁쓸하다.


반대로 세상의 기준에서 그다지 잘나 보이는 게 없더라도 내가 맘 편하고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게 ‘내 사랑’이지 않을까. 설사 한참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심지어 동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싱글의 입장에서 참 도리가 없고 안타까운 건, 그런 상대는 운명처럼 완성품(?)으로 만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 함께 한 기간’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30살에 만나 40살이 돼서야, 40살에 만나면 50살이 돼서야 서로가 ‘익숙해지고 내 사람으로 다듬어진다’는 얘기다. 사랑에 나이가 없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서로를 내 사람으로 만들’ 기본 세월이 필요하다는 점에선 소위 노처녀·노총각들은 소중한 기회와 기간을 많이 놓쳤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런 상대가, 그러니까 나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눈빛만 봐도 카톡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는 상대가 애정에 기반한 육체관계를 동반하는 상대가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런 또래 친구들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이 내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제외하고, 사랑이 별거인가 싶다. 뭔가를 함께 하고 싶고, 함께해야 한다면 그 사람이 제일 편하고,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나눠도 되고, 불필요한 오해와 긴장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게 사랑 아닐까.      


비록 이 멋진 바다의 일출과 일몰, 왜 지금까지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구름의 형상, 종잡을 수 없이 몰아쳤다가 시간이 멎은 듯 잠잠해져 버리는 바람을 함께 할 상대는 없지만, 나는 ‘내 사람’들이 아주 없지 않구나 하며 외롭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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