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미국 연수에서 나의 첫 번째 여행지 ‘버킷 리스트’는 콩코드(Concord)였다. 동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 옆에 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소로의 『월든』을 인상깊게 읽고 꼭 한 번 그가 (너무 심할 정도로)자세히 묘사한 호수와 주변을 직접 보며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싶었던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콩코드는 미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1775년 마을 민병대가 영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독립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또 소로를 비롯해 랄프 왈도 에머슨, 나다니엘 호손, 책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콧(알고보니 아버지인 브론슨 올콧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허먼 멜빌 등 위대한 문인과 사상가들이 활동하며 자유롭고 자주적인 건국 사상의 뿌리를 다지기도 했다.
나는 미국 온 지 딱 6개월이 되는 날을 기념해 여행 날을 잡았다. 보스턴 시내를 여행한 뒤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리프트(Lyft)를 불러타고 콩코드로 향했다. 리프트는 우버(Uber)랑 비슷한 택시 앱인데 가격이 더 싸서 주로 이걸 이용한다. 운전기사는 쾌활해 보이는 흑인 남자였다. 고향은 우간다이고 10년 전쯤 미국에 와서 일한다고 했다.
드디어 점심 무렵 눈 덮인 고요한 콩코드에 도착했다. 마을은 그림책에 나오는 것처럼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방 6개짜리 작은 인(Inn)이었는데 고풍스러운 외관에 빈티지 스타일의 가구들이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배치된 아늑한 곳이었다. 직접 손님들 아침 식사로 머핀을 굽고 잼을 만들며 25년째 숙소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반갑게 2층 방으로 안내해 줬다.
작은 황동색 방 열쇠를 탁자에 놓고 한숨을 돌리며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는데…딱딱한 사각체가 만져지지 않았다. 왼쪽, 오른쪽. 좁은 주머니 안에서 손을 휘저어 봐도 휴지 쪼가리 몇 개뿐이었다. 지퍼가 달린 가슴쪽 포켓에 손을 넣어봤지만 보스턴 지하철 티켓과 휴지 쪼가리밖에 없었다.
옆으로 메는 가방에도 역시나 여권과 수첩, 물병, 휴지 쪼가리(이 놈의 휴지는 왜 이렇게 많은 거지)가 전부였다. 에이 설마, 하며 연신 손을 조몰락거려봤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그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었다. 그 어디에도. 리프트를 타기 위해 분명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고, 나는 습관적으로 패딩 겉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다녔다. 순간 운전기사와 가벼운 얘기를 하는 동안 ‘콩’하는 소리가 났던 기억이 났다. 뒤에 실은 여행가방이 부딪히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핸드폰 떨어지는 소리였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해외에서, 그것도 멀리 여행 온 곳에서, 그것도 작은 시골 마을에서. 대부분 혼자 다니는지라 어딜 가나 꽤 긴장하며 소지품을 잘 챙기는데…현실 같지가 않았다.
난 정말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순간, 영하에 바람까지 부는 날씨에도 온몸에 열감이 쫙 퍼지면서 뭔가 따끔따끔 돋아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와 주인아주머니에게 택시에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고 했다. 긴장하니 영어가 더 안 돼 말이 엉망진창으로 나왔다. 주인은 알아듣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화를 쓸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작은 방에 차려놓은 사무실 전화를 쓰라고 했다. 내 번호를 눌렀지만 연결음이 없었다. 몇 번 해보고 낫 워킹, 더즌 앤써, 아이 캔트, 노 링…엉망진창 영어를 했더니 1번을 먼저 눌러야 한다고 했다. 다시 해보니 이번엔 바로 보이스 메일로 넘어갔다. 미국에 온 뒤 보험사 광고 등 광고와 스팸 전화가 하도 많이 와서 저장하지 않은 번호는 연결이 안 되도록 설정을 바꿨던 기억이 났다. 젠장. 주인이 핸드폰 소리를 켜놨는지 무음으로 해놨는지 물어봤다. 그것도 기억이 잘 안 났다. 젠장. ㅠ.ㅠ
리프트 회사의 전화번호가 있을 터였다. 아주머니 PC로 구글에서 리프트를 검색해 ‘customer Service’를 찾아봤지만 없었다. 간신히 대표번호를 찾았지만 ‘생사가 걸린 긴급사항은 911을 누르고, 그게 아니라면 http쩜 헬프 쩜 리프트 쩜 어쩌고 하는 사이트로 들어가라’고만 한 뒤 끊어졌다. 비용을 아끼려고 콜센터를 운영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헬프 쩜 어쩌고 사이트에는 분실물 코너가 있었다. 하지만 운전기사에게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로그인을 하려고 해도 아이디나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난다. 모든 암호는 핸드폰 문서에 저장해 뒀다. 전화번호로 로그인하려 했더니 이번엔 핸드폰으로 본인인증 번호를 발송했다고 했다. 난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요…. 어떡하지? 하우 슛 아이 두? 어떡하지? 하우 캔 아이 두? 말도 안 되는 영어와 한국말이 동시에 나왔다.
저 아래 운전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코너가 있었다.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넣고 사연을 적으면 회사에서 ‘이런 내용이 올라왔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 있나요?’ 라고 기사들에게 보내는 정도의 서비스인 듯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운전기사의 이름(존폴·Johnpaul)과 차량 종류, 몇 시쯤 이용했는데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 제발 도와달라고 적었다.
문득 함께 연수 온 지인들의 번호는 저장돼 있으니, 이메일로 내 전화기로 전화를 좀 걸어달라고 하면 될 거란 생각이 났다. 다시 주인 컴퓨터 앞에 앉아 그들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한 통도 없었다. 그 많은 연락을 모두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은 것이다.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한 시간이 흘렀다. 이미 예약해 놨던 작은 아씨들 투어는 갈 수 없게 됐다. 입장권이 바코드 형태로 핸드폰 안에 있는 데다 시간도 지났다. 시간이 남았더라도 차량 서비스 앱이 없으니 대중교통이 없는 여기에서 갈 방법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월든 호수는 어떻게 찾아가지. 아직 하루하고 반이 남았는데 그동안 이 시골 동네에서 혼자 뭘 하지.
비행기 티켓,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각종 일정과 연락처, 중요한 기록과 문서, 영수증도 모두 핸드폰 안에 있었다. 돌아가면 핸드폰을 어디에서 사지. 돈은 얼마가 들까. 그 많은 앱과 정보들을 복구할 수 있을까. 연수와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어떡하지. (돈을 내고 백업 용량을 늘리라는 메시지가 왔지만 안 하고 있었다)
숙소 입구엔 커다란 괘종시계가 서 있는데 정각마다 시간 숫자대로 종이 울린다. 땡땡땡땡. 4시다. 혹시나 운전기사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염없이 현관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다. 이 작은 동네에 빨간색 도요타 하이랜더 하이브리드가 그렇게 여러 대 오갈 줄은 몰랐다. 같은 차를 보고 뛰쳐나갈 뻔했던 게 5번은 됐다.
주인이 바람도 쐴 겸 동네를 한 바퀴 돌다 오라고 했다. 고맙다며 그러겠다고 했지만 구글맵이 없으니 어디를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몰랐다.
일단 숨이 막혀 밖으로 나왔더니 과연 공기는 차고 맑아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동네. 걷는 걸 좋아해서 맘 같아선 예쁜 상점들을 구경하며 멀리멀리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길치인 나는 길을 잃을 게 분명했다. 단순 무식하게 앞으로 쭉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 말고는 자신이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코로나 한 복판에 마스크 없이 외출한 것처럼, 핸드폰 없이 숙소를 벗어나 낯선 거리에 들어서자 헐벗고 불안한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스마트폰에 지배당한 현대인의 실상인가.
어항 속 금붕어처럼 왔다 갔다 돌아오니 저녁 5시. 해가 지고 있었다. 주인은 안타깝단 표정으로 ‘폰은 울리지 않았어’라고 했다. 양해를 구하고 다시 내 이메일 서버에 들어가 봤지만 회사로부터 온 메일은 없었다.
방에 들어와선 자책뿐이었다. 이 좋은 날에, 이 아름다운 동네에서, 이 예쁜(그리고 비싼) 방 안에서 뭘 하고 있는거지. 어떤 것도 즐기지 못하고 이 소중한 시간과 장소를 날려버리다니. 왜 평소와 다르게 핸드폰을 신경쓰지 않았을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라지만 그게 왜 다 불운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녁이라 배가 고팠지만 동시에 고프지 않았다. 식탐하면 나인데 보스턴에서 사 온 빵과 과자, 사과 등 아무것도 먹을 기분이 안 들었다. 미니 팩 와인이 눈에 띄었다. 오늘 월든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려고 준비해 온 거다. 다 틀렸다. 그걸 그냥 벌컥벌컥 들이켰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그나마 술이 들어가더라.
이맘때쯤이면 핸드폰으로 내일 갈 곳 정보를 알아보고, 루트를 짜고, 입장권 등을 확인하고, 전날 갔던 곳 사진들을 넘겨보며 흐뭇해하고…이런 즐거운 준비를 하는데 모두 불가능했다. 뭐라도 해 보려고 펜을 들고 수첩에 이것저것 끄적였다. 넋두리와 제발 폰을 찾게 해 달라는 기도같은 내용을 적고 있었다.
작은 동네다 보니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고요했다. 평소에 그렇게 원했던 고요함인데 그게 더 불안했다. 미국에 온 뒤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뜯어가려는 아파트 오피스와 보험사들,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손해 본 일들, 비싼 물가와 환율, 과도한 팁 문화, 카페나 주차장, 택배 보관실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도난 등이 떠올랐다. 이런 나라에서 아무 연고도, 사회적 신분도 없는 내가 핸드폰을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가 이 일을 자세하고 길게 적어두는 이유는 핸드폰이 이토록,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중요한 물건이 됐다는 점을 되새기기 위함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핸드폰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싶어서다.
저녁 8시. 핸드폰을 잃어버린 지 약 7시간 만에 리프트 운전기사가 핸드폰을 들고 숙소로 왔다. 아래층에서 주인이 ‘오우, 폰!!’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태어나서 모르는 사람을 덥석 안아 본 건 처음이었다. 나보다 두 배는 큰 덩치였는데 핸드폰을 받아들고 손을 마구마구 잡고 흔들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몇 군데를 더 도느라 늦었다고 했다. 나는 ‘하우 캔 아이 땡큐’ ‘하우 캔 아이 리워드 유’ 이번엔 기뻐서 엉망진창 영어를 쓰면서 그의 손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현금이 3달러 밖에 없으니 계좌번호를 불러주면 사례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한사코 괜찮다며 “이건 네 휴가잖아. 여기를 즐겨”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나. 그럼 앱을 통해 팁으로 돈을 보내겠다고 했다. 앱을 켜봤더니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나서 6달러 정도 기본 팁이 자동으로 그에게 배정됐고, 추가할 수 있는 금액은 25달러가 최대치였다. 일단 그 금액을 보냈지만 보답으론 너무 부족했다.
내가 한국 식당에서 서로 ‘내가 내겠다’며 우기는 모양으로 잡고 놔주지 않자, 그는 언제 공항으로 가냐며 그날 자기가 데리러 올 테니 점심을 먹자고 했다. 당연히 OK였다.
존폴 덕에 나는 다음 날 남은 하루를 오롯이 보내며 월든 호수, 영국군과 마을 주민들이 전투를 벌였던 노스 브리지, 작은 아씨들이 탄생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오차드 하우스’, 수많은 문인들이 묻힌 아름답고 드넓은 묘지 ‘슬리피 할로우’ 등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하며 함께 걱정해 준 주인아주머니 선물로 꽃 한 다발과 치즈도 샀다.
돌아오는 날 존폴에게 점심을 대접하며 이런저런 즐거운 수다를 나눴다. 그는 나보다 10살 정도 어렸고 귀여운 딸,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보스턴 외곽에 살고 있었다. 우간다는 영국 식민지배를 받아 존폴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원래 이름은 ‘와쓰와(Wasswa)’라고 했다. 와쓰와는 우간다 말로 ‘쌍둥이 남자아이’라는 뜻이란다. 그에겐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다. 우간다에 4가지 언어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간다인인 게 자랑스럽고 딸에게도 우간다 말을 가르친다고 했다. 돈을 벌고 공부를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살 거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코로나에 걸린 적이 없다며, 비결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뭐냐니까 “즐겁게 열심히 일하고(hard working) 생강하고 마늘을 많이 먹으면 바이러스가 다 도망간다!”고 했다. 하하하 와쓰와는 한국인이었나!
또 위스키를 좋아하고 먹는 것도 좋아하는데 살이 쪄서 요즘은 자제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고 했다. 내친김에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가 뭐냐고 물어봐서 옆에 있는 주류상점에 들러 그걸 사서 선물했다.
와쓰와는 보스턴 시내에서 가까운 ‘캐슬 아일랜드’에서 잠시 내려 북대서양을 보여주고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새해 첫날 해돋이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설명했다. 머리 위로 갈매기들이 너무 많이 날아다녀 피하려 했더니 갈매기 똥을 맞으면 운이 좋은 거라며 깔깔댔다. 나는 공항에서 그와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 몸조심하라고 하고 서로 자신이 있는 곳에 오게 되면 꼭 다시 보자고도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내 기준에서 여러 가지 힘들고 부당한 일을 겪은 건 사실이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라지만 그게 왜 다 불운일까’라고 삐딱선을 탄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 와서 거의 처음으로 예상치 못한 일 중에 행운을 경험한 거다.
핸드폰을 되찾은 게 기쁘고 다행인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고향도, 사는 곳도, 언어도 다른 누군가를 만나 친절과 호의를 느끼고, 진심으로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주고받은 건 특별한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부정과 경계의 감정을 조금은 덜고 ‘남에게 친절하고 더 베풀고 살자’ '나부터 누군가에게 불운이 아니라 행운 같은 경험을 주는 일을 하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부정의 경험과 긍정의 경험은 분명 내 안의 무언가를 채우는 기운이 다르다. 사랑이 그렇듯…친절과 호의는 받아봐야 베풀 수 있다.
보스턴과 콩코드 여행은 오래도록 아름다운 자연으로 기억될 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심장이 덜컹했던 핸드폰 사건과 그로 인해 이어졌던 짧지만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게 될 거다. 나의 미국 반년 기념일을 생각하면 늘 미소짓게 될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