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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22. 2023

공항을 드나들며 ‘나답게 살기’ 답을 찾았다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또 하나의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겨울의 시카고는 정말 춥다. 2월도 막바지인데 아침엔 영하권인데다 ‘Windy City’라는 별칭답게 바람이 꽤 불어서 체감온도가 확 떨어진다.

그래도 저마다 개성있고 위풍당당한 빌딩들과 풍부한 예술자산, 다양한 먹거리 등 독특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대도시 특유의 활기와 신선한 지역색이 멋들어지게 공존하는 곳이다.         

나는 여행 고수가 아니다. 더 어렸을 때도 낯설고 아찔한 뭔가에 끌리지 않았다. 휴가철이 되면 안 가 본 곳으로 자주 여행을 갔지만, 안전하고 예상가능하고 시스템이 잘 정돈된 곳이었다. 도쿄·뉴욕·파리·LA·잘츠부르크·샌프란시스코·함부르크·시드니·프라하 등등…. 아프리카나 남미·인도·중국 등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한 마디로 탐험가나 모험가 기질이 부족하다;;; 인정!!

     

해외 1년 연수자들의 ‘국룰’은 여행 많이 하기다. 한 후배는 미국 온 지 두 달 만에 온 가족과 주요 여행지를 다 돌아 1년치 예산을 거의 다 써 버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미국에 있으면 미국 내 유명한 관광지는 물론이고, 캐나다와 남미 국가들이 참 가깝다. 영국·프랑스·독일·스페인 같은 유럽도 한국에서 가는 절반의 시간으로 저렴한 가격에 다녀올 수 있다. (의외로 하와이는 한국에서 가나 미국에서 가나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 좀 큰 차로 미국 동부·서부를 각각 묶어 로드트립을 하는 게 일상다반사다. 심지어 한 달 정도 잡고 미국 동서를 가로지르고 캐나다까지 로드트립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동안 시간이 부족해 여행에 목마른 사람들에겐 절호의 기회다. (돈 드는 건 별개의 문제고)     

나 역시 혼자 몇 개월을 지내고 있지만 워싱턴DC·나파밸리·올랜도·시카고 같은 곳들을 다녔으니 나름대로 여행을 많이 한 셈이다. 하지만 주변 연수자들은 아쉽고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다.


아니, 비행기값 아깝게 거기까지 갔으면서 왜 ○○는 안 찍고 왔어? 차로 2시간만 더 가면 되는데 왜 그냥 왔어? 평생 다시 안 올 기회인데 미국까지 와서 멕시코랑 쿠바를 안 가?


맞는 말이다. 드넓은 미국 땅과 잘 뻗은 고속도로를 생각하면 동부만 해도 워싱턴DC·뉴욕·보스턴이 좌라락 붙어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비행기로 어딘가 여행을 갔다가 집이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워싱턴DC를 갔다가 뉴욕도 안 들르고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오고, 다시 그 옆 동네를 갔다가 돌아오고, 무려 6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나파밸리까지 가 놓고 돌아오고, 다시 옆 동네인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고 이런 여행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건 뭐 공항 마니아도 아니고 돈 낭비, 시간 낭비로 볼 수 있다. 기간도 기껏해야 3박4일, 4박5일 정도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소극적이고 심플한 여행코스(코스랄 것도 없다)에 머쓱해져서 아예 ‘나 여기 다녀왔다!’는 말을 안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이런 소소한 여행들을 통해 ‘나답게 살기’를 배우고…뭐랄까, 확신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동안 수없이 ‘인생을 원하는대로 즐겨라’ ‘자신을 사랑하라’ ‘나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 같은 말들을 들어도 그게 뭔지 잘 와닿지 않았다.      

물론 나이를 먹은만큼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대충 어떤 성격이고 장단점이 뭔지는 안다. 하지만 진짜 나답게 사는 걸 실천하며 사는 게 어떤 건지는 두루뭉술하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생처음 이렇게 많은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권리이자 의무(?)같은 여행이란 활동을 반복하다 보니 다른 활동들에도 적용할 수 있는 답을 찾은 것 같다.     


나답게 사는 건 무조건 불편하고 싫고 어려운 일들을 피하는 게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하기 싫고 부담되고 껄끄러운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부모자식형제간에도 그렇다. 그래도 해야할 건 의무를 다하고, 원만히 풀어야 할 건 풀고, 조율할 건 조율하면서 사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나답게 살기의 핵심은 그러지 않아도 될 때, 예를 들어 휴일이나 휴가를 보낼 때, 식사 메뉴나 책과 취미활동 고르기 같은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슈일 때, 내 마음이 제일 편하고 내 기분이 제일 좋은 쪽으로 선택해 그렇게 하는 거다. 제일 편하고 좋은 게 딱 잡히지 않는다면 반대로 너무 내키지 않고,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끌리지 않는 걸 과감히 안 하는것도 똑같이 훌륭한 방법이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살다보면 크고 작고 선택할 게 많다.  

여행을 예로 들면, 나는 안전한 게 최우선이다. 여자고 싱글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영어가 통하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안전한 곳이 아니면 아무리 기상천외한 이국적이고 색다른 게 펼쳐져도 불안하고 불편하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결벽증까진 아니래도 미국 거리에 있는 쓰레기통 손잡이를 맨손으로 잡지 않고 화장실도 더러운 곳은 아예 가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부분을 아끼더라도 조금 더 좋은 호텔을 잡는다.


나는 좋아하는 한 곳, 한 대상을 오래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훌륭한 뮤지엄이 있는 곳에선 하루를, 어떤 때는 이틀 전부를 그곳에서 보낸다. 나와 통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그 앞 의자에 앉아서 수없이 많은 생각과 공상, 감정이 밀려드는 게 내겐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다.

시카고 뮤지엄(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의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 (구스타브 카유보트 1877년)

예전엔 여행책자를 들고 여기서 ‘꼭 봐야한다’는 주요 관광 포인트를 몇 분 간격으로 다 찍고 돌아다닌 적도 많았다. ‘와, 하루 만에 다 봤다’ ‘뽕을 뽑았다’는 만족감은 있었지만 특별한 감정을 느낄 기회가 없었으니, 힘만 들고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나다운 게 아니었던 거다.     


나는 허리가 좀 안 좋고 무거운 짐을 싸들고 다닐 신체 조건이 안 된다. 그렇다고 매번 누구에게 짐 좀 옮겨달라, 이것 좀 도와달라는 민폐를 끼치는 게 참 싫다. 그래서 여행 일정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짧고 짐도 가급적 단출한 게 좋다.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게 있다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안전하고, 깨끗하고, 맛집 다 가고, 돈도 아끼고, 볼 것도 다 보고, 힘도 안 드는 여행같은 건 없다. 인생의 모든 부분도 마찬가지다.

      

영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욕심과 효율을 내려놓고 포기하면 그 순간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하찮은 예지만, 이번 시카고에서도 돌아오는 당일 오전 상황이 그랬다. 그동안 너무 먹고 싶었는데 식당이 없어 못 먹던, 딱 이거다 싶은 메뉴를 파는 맛집을 찾았는데 오픈 시간이 오전 11시였다. 그런데 역시 이거다, 싶은 뮤지엄 오픈 시간이 오전 10시인 거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적어도 낮 1시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순간 구글맵으로 두 지점 사이 거리를 찾으며 10시에 뮤지엄에 가서 1시간 만에 확 다 보고 바로 달려가서 먹고 출발하자, 아니야 11시에 그 메뉴를 빨리 먹고 12시부터 뮤지엄을 1시간 동안 보고 공항으로 달려가자, 꽤 갈등이 됐다. 그만큼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를 이것들 때문에 다시 올까? 확률은 거의 제로.

 

맛집 대신 선택한 시카고 <Driehaus Museum>. 19세기 전형적인 고급맨션의 양식을 보여준다.

결국 식당을 포기하고 뮤지엄을 택했다. 촉박한 상황에서 서두르는 게 싫고, 불안한 그 감정은 더욱 싫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여유있게 보는 걸 좋아하는 게 나라는 사람의 성향이니까. 하나를 포기하니 많은 여유가 생겼고 만족스럽게 작품을 감상하고, 차분하게 공항에 돌아와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좋고 싫어하는 것들을 스스로 인정하고 당당해지고, 심지어 그에 맞춰 행동하는 걸 뿌듯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나에게 맞는 선택과 결정을 내려놓고 남의 눈치를 과하게 의식하고(아주 의식을 안 할 순 없다) 마음 한켠에 찝찝한 감정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다면 그건 나답게 사는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나중에 속이라도 편하게 남들이 하는대로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그러다가 점점 불만이 쌓이고 뭐랄까,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나 공허한 마음이 들어 아주 기쁘게 ‘야, 우리는(스스로에게 혼잣말을 잘한다) 그냥 이렇게 살자!’ 라고 마음을 먹은 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뭔가를 한다. 이걸 가지고 굳이 남들을 설득하며 내가 맞다, 이게 더 좋은 거다,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모든 건 공동생활이나 서로서로 연결돼 있는 직장업무가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적인 부분이 많은 상황에서의 얘기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는 이런 ‘개인적인 상황과 시간’이 의외로 참 많다. 그 부분만 나답게 살아내고, 그걸 뿌리내리고 다져나가도 일상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충만함이 크다.      


북한산 인수봉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절경을 못 보는 건 아쉽다. 올라가지 않는다면 평생 그 감동은 못 느끼겠지. 하지만 내 몸 상태와 선호에 따라 평평한 북한산 둘레길을 여러 번 돌고 예쁜 들꽃과 새소리에 몇 분이라도 행복했다면, 나답게 살면서 느끼는 또 다른 감동이 될 거다.      

조만간 미국 대학들은 봄방학에 들어간다. 나는 시카고 옆 보스턴으로 또 짧지만 즐거운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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