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나는 외국을 여행할 때 ‘워커(Walker)’형이다. 렌터카보다는 걸어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편이다. 거리가 멀면 버스·지하철·트램·열차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솔직히 말하면 (중국과 붙어있어서 미세먼지로 고생하는) 한국보다 이렇게 공기가 좋은데, 이럴 때 걸어야지 언제 맘 놓고 걷겠냐 싶어서다. 더 큰 이유는 뚜벅이로 다니다 보면,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모습들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도 만나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유명 관광지가 화장 잘 한 예쁜 모습이라면, 그곳까지 걸으면서 만나는 모습은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랄까.
특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연수온 뒤 어쩌다 차 없이 살면서 어디든 현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익숙해졌다. 주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용어나 시스템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선 버스에서 내릴 때 노란색 줄을 당기면 ‘Stop Requested’라는 알림이 뜨면서 다음 역에 정차하고, 아주 번화한 곳이 아니라면 신호등 옆에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의 보행 신호가 들어온다.
대중교통의 장점과 단점은 뚜렷하다. 일단 싸다. 한번에 1.75~2.5달러 정도. 아예 공짜인 곳도 있다. 게다가 미국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걷는 데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정류장이 굉장히 촘촘히 있다. 돈 없는 외지인 입장에선 교통비를 아끼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다.
단점은…목적지까지 오래 걸린다는 것. 또 별의별 사람이 다 이용하는 만큼 불쾌한 경험을 할 확률도 높다는 것.
미국에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사는 사람은 딱 두 부류인 것 같다. 대학생 아니면 아주 못 사는 사람. 미국인이라면 대게는 아무리 작고 찌그러지고 벗겨져도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미국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행색이 눈에 띄게 허름하거나 노숙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 (주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른다;;) 등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또한 현지 사람들처럼 그냥 그러려니 한다.
와…그런데, 로스앤젤레스(LA)는 아니었다. 코로나 이후 미국 물가가 너무 오르고, 환율도 최악이라 경비도 아낄 겸 LA 교통카드인 탭(Tap)과 LA모바일 앱을 다운로드 받아 빵빵하게 충전하고 길을 나섰는데, 한 마디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LA에 노숙자가 많고, 공기나 거리가 깨끗하지 않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애초에 쾌적한 도심은 기대하지 않았다. LA가 처음도 아니다. 2017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 기관(패서디나·Pasadena에 있다)을 방문할 때 들렀고, 2019년에도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한 대도시의 노력을 취재할 때 와봤었다.
와, 그런데 이건 상상을 초월한다. 공항에서 리프트(lyft)를 불러타고 LA 다운타운 호텔에 도착한 게 아침 10시. 구글맵을 켜고 룰루랄라 5분 거리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본 노숙자만 수십 명은 되는 것 같다. 이 중에는 몸을 휘청휘청 흐느적거리며 제대로 못 걷는 사람도 꽤 됐다. 술에 취했거나 약을 한 것 같았다. 아침 10시에!!
사방이 탁 트인 거리인데도 걸을 때마다 특유의 지린내가 진동했다. 건물 외벽 아래엔 이불담요며 비닐 봉지며 이것저것 챙겨서 눕거나 앉아있는 노숙자들 천지였고, 굴다리라도 지날라치면 어김없이 텐트를 친 노숙자촌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위험한 곳에 호텔을 잡은 게 아니다. 오히려 가장 번화한, LA 패션지구와 보석지구 등이 있는 도심 한 복판이다. 하지만 패션•보석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에 보도블록엔 뭔지 알 수 없는 검고 짙은 얼룩들이 뒤덮여 있었다. 시에서 청소를 하는지 안 하는지 곳곳에 쓰레기가 수북했고, 이걸 또 노숙자들이 다 헤집어 놓아 주변 곳곳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일부러 저렇게 분장을 해도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다 찢어진 거적데기를 걸친 사람, 한쪽 바지가 다 찢겨 나갔는데 그 사이로 온통 고름 같은 노란 물집이 가득히 덮여있는 다리로 절뚝이며 걸어다니는 사람, 구석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 복판에 누워있는(그냥 정신을 잃은 것도 같았다) 사람 등 이건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덤덤하게 갈 길을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통 걷는 여행의 즐거움은 길거리 상점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 라인과 하늘 등을 구경하는 게 크다. 헌데 LA 도심은 바로 앞의 오물과 노숙자들을 피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런 게 불가능했다. “헤이 레이디!”하며 접근하는 노숙자가 있어 식겁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혹시나 자신이 부르는데 무시한다고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지 온몸이 긴장됐다. 보통은 걸음을 멈추고 이곳저곳 사진도 찍곤 하는데, 여기선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버스를 탔는데…버스 안도 가관이었다. 좌석과 통로는 더러움이 도를 지나쳤다. 플라스틱 그릇, 캔 등 노숙자들이 흘리고 간 각종 음식물과 물건들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정류장에서 노숙자들이 탔는데, 버스기사는 아예 포기한 건지 그들이 무임승차해도 그냥 내버려 뒀다.
이들 중엔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승객사이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어 나는 당장이라도 뛰쳐 내리고 싶었다. 어차피 버스 노선을 따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온통 노숙자촌과 더러운 거리가 대부분이었으니.
뉴욕이나 시카고·보스턴의 노숙자들이 ‘도와달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면, LA의 노숙자들은 말 그대로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를 왜 왔지, 돈 아끼겠다고 왜 버스를 탔을까, 온갖 후회가 밀려왔다. 피 같은 여행에 이게 무슨 풍경과 경험이란 말인가. 1시간이 10시간처럼 느껴졌다.
목적지인 산타모니카 해변에 도착해 바다를 보며 걷는데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길을 가며 마주치는 흑인·히스패닉계 사람들조차 무섭게 느껴졌다. 인종차별이 아니라 방금 전에 본 노숙자들 중엔 백인보다 유색인종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엔 무조건 리프트를 불러 탔다. 멕시코계 미국인인 운전기사가 ‘오늘 하루 어땠니?’라고 묻는 바람에 긴장이 풀려서 이러저러해서 너무 놀랐고 실망했다고 털어놨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깜짝 놀라며 자신은 LA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지만 절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아무리 바빠도 차로 세 아이를 학교에서 집까지 통학시키고, 아이들에게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했다.
그는 LA 다운타운에만 4만명이 넘는 노숙자가 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현지 언론을 찾아보니 작년 기준으로 LA시티 노숙자는 약 4만2000명, LA 카운티에는 약 7만명이다. LA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3대 지역에선 노숙자 비중이 전체 인구의 평균 20%에 달한다)
왜? 이유를 묻자 일단 날씨가 늘 따뜻해서 머물기 좋기 때문이란다.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지원이 잘 되는 것도 한 이유다. 운전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우세지역인 캘리포니아주는 노숙자들이 지원센터에 들어가지 않아도 강제하지 않는 분위기이고, 이들에게 식료품 등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수표나 바우처 등이 지속적으로 지원된다고 한다.
한 번은 자기가 편의점에 들렀는데, 웬 노숙자가 물건을 사면서 점원에게 ‘잔돈은 그냥 가져(Keep the change)’라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전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일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란 거다. 그래서 미국 전역에서 이곳으로 노숙자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나야 늘 대낮에만 돌아다니지만, 운전기사는 절대 밤에 LA도심을 돌아다녀선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불과 얼마 전에도 새벽 1시쯤 손님을 태우러 갔는데, 몇 분을 기다려도 안 나타나서 그냥 돌아가려 했더니 잠시 뒤에 그 손님이 전화해 웬 남자에게 쫓기고 있으니 도와달라, 이런저런 건물로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는 거다. 그는 “내가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강간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갈수록 노숙자들이 늘어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LA로 구경오지 않나요?” 내가 묻자 그는 웃으며 “유명 관광지는 주로 외곽에 있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바로 목적지까지 가니 도심 속 모습은 볼 일이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몇 년 전에 출장왔을 때 택시로 목적지까지 바로 가거나, 한국 지인이 자신의 차로 공항에 마중 나와 데려갔었지 이렇게 건물 모퉁이를 돌아 구석구석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LA에서 이틀을 보낸 뒤 같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샌디에이고로 넘어왔다. 샌디에이고는 미국에서도 아름답고 부자들 별장이 많은 부촌으로 이름나 있다. 확실히 전반적인 분위기는 LA와 달랐다. 걷는 거리도 그렇고, 버스나 트롤리(지상을 달리는 열차)같은 대중교통도 깨끗한 편이었다.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샌디에이고 역시 곳곳에 노숙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텐트촌도 종종 보였다. 아침에 봤던 노숙자가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올 때도 보였다. 이들은 대형마트 등에서 가져온 카트에 자신의 가재도구를 싣고 다니며 휴지통을 뒤지거나, 열차나 버스가 정차할 때 올라타 승객들이 놓고 간 것 중에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찾는다. 버스에선 승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자신이 먹던 걸 ‘이거 공짜야. 나눠줄까?’ 권하기도 한다.
사시사철 큰 추위없이 온화한 날씨. 푸른 하늘과 탁 트인 태평양. 캘리포니아는 여러 가지 의미로 복 받은 곳이다. 이름난 관광지와 해변은 과연 아름답고 멕시코와 가까운 영향과 이민 역사로 이국적이며 미술과 공연 등 각종 문화와 예술자산도 풍부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걸어 다닐 때 기분 좋은 곳’이 진짜 좋은 곳이란 생각을 한다. 잠깐 와서 큰돈을 쓰고 가는 외지인보다 현지인들이 매일매일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LA같은 곳은 실망스러웠다. 더 큰 문제는 빈부격차와 계층·인종간 갈등, 경기 침체 등과 맞물려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행은 늘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한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가르침도 준다. 이번 LA와 샌디에이고 여행은 추억보다는 기억으로, 느낌보다는 생각으로 남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