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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pr 22. 2023

좋은 자리에선 그냥 좋은 말만 하면 안될까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헬로(Hello!) 하와유(How are you?) 하우짓 고잉(How is it going?) 그뤠이트(Great!) 어썸(Awesome!) 어메이징(Amazing!) 퍼펙트(Perfect!)”


글만 써 놓으니 음악처럼 높낮이가 있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를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미국인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체로 친절하다. 보수적인 문화권의 외국인이 들으면 때론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미국에 연수온 뒤 혼자 무표정하게 길을 가거나, 더욱 무표정하게 산책로를 걷거나, 문의할 게 있어 사무실을 방문할 때나…마치 반가운 친구를 대하듯 인사를 건네는 걸 많이 겪는다.

며칠 전 연수하는 대학에서 서류 뗄 게 있어 국제학생처에 갔는데 앉아있던 여자 몇 명이 “헤이, 하와유!!” 하며 반갑게 손을 흔들길래 나는 내 뒤에 다른 사람을 보고 그러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누가 봐도 ‘국제학생’처럼 보이는 나에게 인사를 한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웬 아저씨가 하늘을 가리키며 “정말 근사하지 않아요?” 라며 웃었다.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초저녁인데 파란 하늘에 말간 반달이 떠 있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말 그렇네요!” 라고 맞장구쳤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이른 봄기운이 확 퍼졌던 3월 어느 날엔 터벅터벅 걷는 산책길에 아주머니 한분이 “저것 좀 봐요. 수선화(daffodil)예요!”라며 말을 걸어 처음으로 그 노오랗고 예쁜 꽃이 수선화란 걸 알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더랬다.     

이 밖에도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감사하다(Thank you)’ ‘미안하다(Sorry)’ ‘실례합니다(Excuse me)’ 를 입에 달고 살아서 쇼핑몰·식당·카페·주차장·버스 등 어딜 가나 곳곳에서 저 소리가 들린다.

“친절하게 말한다고 꼭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내가 미국 사람들이 참 친절하다고 하니까 대학의 한 미국인 교수님은 이렇게 냉정한 팩트(?)를 말해줬다.


물론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에게 잠시 친절한 게 뭐 그리 큰 대수겠는가. 그 친절했던 사람들이 가족이나 지인에겐 퉁명스럽고 매정할 수도 있다. 속으론 별 관심도 없는데 그저 형식적인 친절이고 웃음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연수자나 중국인 학생들은 오히려 미국인들의 이런 과한 리액션이 가식같고 진정성없게 느껴져서 별로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가식이든 형식이든 미국인들의 이런 언어문화가 좋다. 요즘 세상에 우리가 누구한테 얻어맞아서 기분 나쁠 일은 (거의)없다. 다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마음을 다치는 거다. 반대로 한마디 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살아나기도 한다. 부모자식, 형제자매, 부부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부터 친구, 직장동료까지 큰 틀에선 모두 마찬가지다.


속으론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진심은 그게 아닌데 말로 상대를 속상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했다? 친한 사이라면 세상 안타까운 일이고, 별로 안 친한 사이라면 무례한 일이다.


말은 내용도 형식도 모두 중요하다.

우선 내용.

상대가 듣기 좋은 말, 칭찬 같은 말만 하라는 게 아니다. 특히 업무나 일과 관련해선 지적도 하고 반대의견도 내고, 틀린 것은 맞게 바로잡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경고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상, 친목을 위한 만남이나 축하하기 위한 자리 등 좋은 자리에선 굳이 불편하거나 예민한 주제, 비판하거나 지적하는 얘길 꺼낼 필요가 없다.


개인적으로 매사 부정적인 면을 보고 불평불만을 말하는 사람도 별로지만, 습관적으로 지적과 태클을 일삼는 대화도 참으로 힘겹고 피곤한 것 같다.      

일례로 우리가 여름 날씨 얘기를 하며 30도가 넘어서 덥다고 하면, 그냥 그건 사교적이고 가벼운 대화다. 굳이 아니다 여기는 40도는 넘어야 더운거다, 30도 정도를 덥다고 하면 뭘 모르는 거다 등 뭔가를 지적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

요즘 물가가 많이 올랐어요, 하면 그건 같은 생활인으로서 서로 맞장구치고 주고받는 인사 정도의 의미다. 그걸 또 꼭 그런 건 아니다, 어느 곳이랑 어느 시점이랑 비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냐고 따지고 들어가면 숨이 막힌다.

이런 자잘한 내용이 아니라 해도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나 나눌 갑론을박을 가족•친구와 만난 자리에서 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경제학자가 비전공자인 회사원 친구나 부모님과 밥 먹는 자리에서 사는 얘기가 나온다고 학계 지식을 나열하며 숟가락 뜰 때마다 ‘그 말은 학문적 의미에서 틀렸다’ ‘그 말에는 오류가 있다’고 달려들면 그게 즐거운 밥자리겠나.       


다음은 말의 형식.

한국뿐 아니라 아마 모든 나라 말이 알고보면 아 다르고 어 다를거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무안을 주거나 인신공격이 될 수 있는 표현이 있으면 좋을 게 단 하나도 없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지적을 받고 기분 상하는 것도 지적당한 내용 자체보다는 말의 형식 때문인 경우가 많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첫 기자생활을 하던 시절, 담당 장학관이 기자실에 내려와 대학입시 변경안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내가 헷갈리는 부분을 질문하자 장학관은 답변을 하며 “근데 그건 중학교만 나와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을 수도 있고, 전문가 입장에선 내 질문이 굉장히 초보적인 내용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그분은 굳이 그 말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무려 17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때의 민망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더불어 미안하다, 고맙다, 정말 멋지다 같은 인삿말도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형식은 좋은 내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의사소통은 말이나 글, 손짓으로도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말이 좋은 건, 가장 생생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성대와 입을 통해 사람마다 모두 다른 음성과 높낮이와 빠르기로, 무엇보다 나에 대한 감정이 듬뿍 담겨(담지 않으려 해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자메시지나 카톡을 하면서 물결 표시와 느낌표, 온갖 이모티콘을 달아 보내는 것도 감정을 담기 위해서지만 결코 말을 따라갈 순 없다. 그래서 말은 너무나 소중한 동시에 너무나 치명적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이쁘게 말하기’.

어디에선가 읽은, 짧고 단순하지만 참 와닿았던 문구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 말로 인해 누군가를 단 1초라도 기분 좋게 하고 미소짓게 하고, 나중에 좋은 기억이 되어 떠오르게 한다면 그게 바로 말의 존재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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