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미국 여행을 할 때 주변에 묘지(cemetery)가 있으면 꼭 들르는 편이다. 공원처럼 단정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데다 분위기도 차분해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거나 생각에 잠기기 좋기 때문이다.
비석엔 망자의 출생과 사망 연도가 새겨져 있는데 18~19세기에 태어난 경우 20~30대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아무리 당시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짧았다고 해도 한창 꽃다운 나이다. 저 사람은 자신이 젊음을 가득 머금은 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을까. 가족과 친구들은 얼마나 황망했을까. 이런 걸 보면 인생이란 게 참 개인의 노력이나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하늘의 뜻에 달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옛날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큰 변화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아들의 삶은 아버지와 비슷했고, 딸의 삶은 어머니와 비슷했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역시 자신의 부모와 비슷했고….
이유는 우리가 다 아는 것들이다. 종교와 신분제가 사회를 지배하고, 과학과 기술 발전은 더디고, 대중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고, 민주주의와 자유·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아계발 같은 개념도 희박했고.
실제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역사관 등을 둘러보면 지역마다 문화는 달라도, 과거 사람들의 삶은 대략 <식사-농사(고기잡이 포함)-종교활동-결혼-놀이문화와 축제-장례> 이런 큰 카테고리 안에서 수백 년 넘게 큰 변화없이 이어져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단언컨대 내가 과거에 태어났다면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핸드폰이 나오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민간인이 우주여행까지 가는 이 엄청난 변화를 불과 몇 십 년 안에 다 볼 수는 없었을 거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옛날 개인의 삶은 지금보다 여건이 좋지 않았다. 그게 뭐가 됐든 자유와 기회자체가 제한됐으니까.
하지만 미국에 연수와 있는 동안 나는 복에 겨웠는지, 철이 없는 건지, 만용인 건지 문득 과거 조상들의 삶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 듯, 과거부터 이어져 온 궤도를 따라 살았다. 기독교 문화권인 경우 매주 주일엔 교회에 가고, 부활절엔 이걸 하고, 추수감사절엔 이걸 하고, 성탄절엔 이걸 하고 등등.
직업도 당연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고,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삶이 진행되는 길이 정해져 있으니 그걸 따라가는 너와 나의 인생이 예측 가능했고 자연히 오늘날처럼 무한대로 다양한 종류의 비교와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됐을 거다.
우리들 중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사람도 있지만, 주어진 것을 따라가는 게 더 편한 사람도 있다. 역경을 딛고서라도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도 있지만,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뭐든 말하고 쓰고 표현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해보라면 오히려 스트레스받는 사람도 있다.
내가 어쩌다 보니 뉴욕이나 워싱턴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그중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채플힐이란 지역에서 지내게 된 건 어떤 면에선 행운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대도시보다 조금 느리게 돌아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전통대로 살아가려는 문화가 남아있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고, 직업마저 최신 이슈와 트렌드를 좇아야하는 내게 이곳은 단순히 외국이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살짝 느리게 가는 느낌을 주는 신비한 곳이다.
지역에 듀크대와 UNC(유니버시티 오브 노스캐롤라이나) 등 우수한 대학들이 많고, 애플이 연구단지를 고려할 만큼 IT도 발달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 축일 등 전통을 중요시한다.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창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것도 당연히 좋아했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 역시 결코 ‘뒤처지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초중고에선 공부 성적이 우수한 학생도 칭찬받지만, 남을 잘 돕고 지역에서 봉사하는 리더십 있는 아이들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족끼리 모이고, 이웃과 작은 일 큰일을 나누고,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고, 녹지와 동물을 돌보고, 노스캐롤라이나 로고와 상징 색깔이 있는 옷을 즐겨입고, 뭔가를 서두르고 요구해서 상대를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기다리는 게 당연하고… 어찌 보면 좀 구식이고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의 루틴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난 이런 분위기에 숨통이 트이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안도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의 치열한 경쟁과 다이내믹한 성공 욕구가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난 이제 곧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발전이 있든 없든, 바쁜 생활을 하게 될 거란 것도 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독촉하고, 바빠 죽겠는데 왜 운전을 저렇게 하냐고 짜증내고, 다른 사람 다른 조직 다른 회사와 비교하며 우울해 할 지 모른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감히 말하자면 사회가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만 더 줄어들면 좋겠다. 조금씩 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
미소도 친절도 선한 마음도 여유에서 나온다. 공부를 하는 학생은 남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부가 좋아서 했으면 좋겠다. 직장인들에게도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또는 자신이 감당하고 싶은(정말 그 일이 좋으면 누가 안 시켜도 밤을 새우며 한다) 정도의 일이 주어지면 좋겠다.
과거를 살았던 조상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단순한 삶을 살았다면, 우리들은 저마다의 ‘선택에 따라’ 삶의 속도를 올렸다가 늦췄다가, 반경을 넓혔다가 좁혔다가, 그렇게 살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겐 그럴 수 있는 과학 기술과, 근거로 삼기 적당한 가치(철학, 시대사조)가 있다. 돈과 권력, 지위를 이뤄야만 인정해 주는 사회라면 그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과 뭐가 다를까. 오히려 너무 넓어진 기회와 높아진 기대치에 짓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앞으로 인공지능(AI)이 많은 걸 대체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기술이 아직은 실행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성을 소중히 하면서, 대단히 극적인 뭔가를 이루지 않고 살아가도 즐거울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