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얼마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애틀랜타로 가는 델타항공 비행기가 섭씨 44도에 4시간을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승객과 승무원들이 픽픽 실신했다는 뉴스가 났었다.
이게 그냥 ‘세상에 이런 일이’ 국제뉴스가 아니다.
미국에 연수와서 휴일이나 방학을 이용해 30~40일에 한번 꼴로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20년 직장생활 만에 처음 가져보는 자유 아닌가. 그런데 적어도 내 기억으론,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고, 도착하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통계를 낼 만큼 한국에 있을 때 해외를 자주 오갔던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비행기가 매번 지연되고 연착되고, 심지어 취소되는 일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태풍이나 심한 안개 등 기상악화로 문제가 생기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날씨도 멀쩡하고 별다른 이슈가 없어 보이는데 밥 먹듯 일정에 차질이 생기니, 이젠 거의 노이로제와 스트레스에 시달릴 정도다.
이번 달만 해도 다음날 여행을 앞두고 막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띵동’ 핸드폰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내일, 아니 밤 12시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 출발하는 비행기가 취소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승무원 부족’. 그 외에 다른 설명은 없었다.
‘헉!!’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분 지연도 아니고 출발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아예 ‘취소(cancelled)’라고?
이번엔 혼자 가는 여행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친구가 무려 14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 오늘 저녁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게다가 도착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기차까지 예약해 놓은 상태인데, 취소라고? 우리는 어쩌라고?
결국 이 항공사(유나이티드-에어캐나다 공동운항)는 승객들에게 예정일보다 하루 늦은 비행기를 예약해 줬다. 친구는 혼자 하루를 지내고, 예매한 기차표를 위약금을 내고 다음날로 바꿔야 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라 해도 정신적·경제적 피해를 오롯이 고객이 떠안는 셈이다.
여행기간 하루를 날린 것도 모자라 이동시간도 3배로 늘어났다. 비싸더라도 직항 항공권을 예매했는데, 항공사에서 다시 잡아 준 비행기는 다른 공항을 한 번 경유해서 가는 코스였던 거다. 비행기를 두 번 타고 경유지에선 2시간 반을 기다리느라 이동 시간이 6시간으로 늘어났다. 화가 치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유하는 공항에서도 대기시간이 당초 2시간에서 두 차례 늦어지며 탑승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4시간을 기다렸다)
더 황당한 건…그저 웃지요. 친구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직항 항공권이었다)마저 취소돼 다음 날로 밀렸다. 이것 역시 출발 불과 7시간 전에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공지됐다. 돌아오는 비행기 역시 직항이 아니었다. 경유지에서는 게이트가 바뀌고 출발이 지연되면서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나중에 들으니 친구도 예상치 못한 고생을 했다. 몬트리올에서 토론토 공항을 거쳐 인천 공항으로 오는 비행기였는데, 몬트리올에서 탄 비행기가 뜨지 못해 몇 시간을 비행기에 갇혀있었던 거다. 항공사 사정으로 수하물이 미처 다 실리지 못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번 여행뿐 만이 아니다. 미국 남부 탬파에서 노스캐롤라이나 공항으로 올 때는 탑승이 무려 5차례 지연됐다. 보통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1~2시간 전엔 공항으로 와서 탑승을 기다린다. 당시 내가 공항에 와서 탑승구 앞에서 기다린 시간만 5시간이다.
결국 주구장창 사과 방송을 하던 델타항공에선 생수와 간단한 과자가 담긴 박스를 승객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여행은 혼자 갔던 거고 집에 도착한 뒤엔 아무 일정도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미팅이나 약속이 있었던 승객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알겠지만 공항이란 곳은 오랜 시간을 머무르기에 그다지 적합한 곳이 아니다. VIP라운지나 공항 내 간이호텔이라도 이용할 게 아니면, 딱딱하고 비좁은 의자에서 시끄러운 온갖 소음을 들으며 하염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 공항 내 식당이나 바(bar) 역시 비싸기만 비쌀 뿐 편하지 않다. 그나마 인천공항은 세계 1~2위에 들 정도로 쾌적하고 볼 것도 많은 곳이고, 대부분의 공항에서 3~4시간을 기다리는 건 말 그대로 고문이고 고역이다.
어찌어찌 비행기에 탑승했다 해도 제 때 이륙 못하는 경우도 늘었다. 내 경험으론 그때마다 이유가 대충 “활주로에 이륙 대기 중인 비행기가 많아서” “짐이 다 실리지 않아서” “관제탑에서 서류 문제로 이륙허가가 나지 않아서” “보험(무슨 보험을 말하는지는 모르겠다)에 문제가 생겨서” “정부 규제 때문에” 등이었다.
비행기 이륙이 줄줄이 늦어지다 보니 내부도 엉망인 적이 많았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과자 부스러기가 있고, 바닥엔 쓰레기가 그대로고, 머리 받침대엔 머리카락이 있고…이게 고속버스인지, 비행기인지.
내가 제트블루나 프런티어 같은 저가 항공사를 이용한 것도 아니다. 늘 델타·유나이티드·아메리칸에어라인 등 큰 항공사를 이용했다. 그런데도 이럴 정도다.
비행기는 승객이 가장 ‘을’인 이동 수단이다. 한 번 사고가 나면 대형참사로 이어지는 만큼 안전이 중요해서 공항과 관제탑, 기장과 승무원들의 말에 거의 무조건 따라야 한다. 내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도 비행기가 출발하지 않을 수 있고, 떴다가 그냥 회항할 수도 있다.
여행자 보험 등을 봐도 웬만큼 큰 사고나 항공사 측의 명백한 과실이 아닌 다음에야, 승객이 세세한 사항들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기 어렵게 돼 있다.
‘제가 뒤에 면접 인터뷰가 잡혔는데요’ ‘친구가 기다리는데요’ ‘호텔이랑 기차를 다 예약해 놨는데요’ 뭐 이런 승객 입장에서 절박한 사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나만 유난히 재수가 없어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 연수온 다른 사람들이나 현지인들에게 들어봐도 항공기 지연·연착이 갈수록 일상다반사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하늘 길이 막히고 항공산업과 밀접한 여행·관광산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승무원들이 대량 해고되고, 관련 유지·보수 산업이 와해되고 축소되면서 여객기 전체 ‘운영’ 자체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 분위기다.
여기에 시대와 세대가 바뀌면서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임금과 근로조건, 복지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며 태업과 파업이 잦아지고 있다. 이걸 함부로 강제하거나 규제할 정부 기관의 입지도 예전만 못하다.
3년 만에 코로나가 끝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해외출장과 해외여행을 원하지만, 항공·공항 인프라는 코로나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않고) 있는 거다. 기상상황조차 갈수록 이변이 잦아져서 비행기 정시운항을 어렵게 하고 있다.
자, 나는 이번 연수 생활을 하면서 ‘예전 수준으로 누리려면 돈이 훨씬 더 든다’는 데 이어 또 한 번 마음을 내려놓게 됐다. 앞으로 출장이든 여행이든 ‘비행기 일정은 예정대로 된다’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는 거다.
모르긴 몰라도 세계 주요 공항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어느 한 공항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공항에도 차질이 생기는 식이다.
반면 이용자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그동안 해온 대로 최소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얌전히 수속을 밟고 기다려야 한다. 그 뒤에 비행기의 출발이 늦어지든, 비행기 안에 갇혀서 뜨지 못하든, 취소가 되든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 회사 출장이든, 개인 휴가 여행이든 난감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비행기 출발과 도착 앞뒤로 적어도 하루 정도는 넉넉히 시간을 둬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비행기 여행은 운임이 비싸다는 점, 이코노미석으로 장시간 갈 경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곤 색다른 즐거움이자 이벤트였다. 하지만 당분간 순수한 ‘비행’ 외에 출발과 대기, 도착과 짐찾기 등 수많은 변수가, 예상치 못하게 닥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