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직장생활에서 한번뿐인 해외 연수를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Chapel Hill)에서 하게 된 건 행운이었다. 어딜 가나 녹음이 우거진 노스캐롤라이나, 그중에서도 오래된 도시. 참고로 노스캐롤라이나는 넷플릭스의 인기 서사드라마 '아웃랜더(outlander)'에서 주인공들이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초반엔 뉴욕이나 보스턴처럼 편의시설이 발달한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 혼자 생활하는 게 힘든 점도 많았다. 하지만 평생을 사람 많고 차 많은 서울에서 정신없이 살아온 나에게…이곳은 새로운 휴식, 마음의 평화를 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오늘은 별 건 아니지만 미국에 와서 처음 일상으로 접하게 된 ‘소리(sound)’들을 적어볼까 한다. 그중엔 좋은 소리도 있고, 다소 신경을 거스르거나 무서운 소리도 있다.
<부아아앙 – 제발 빨리 끝났으면>
노스캐롤라이나는 일 년 내내 해가 짱짱하고 비가 충분히 내린다. 식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그래서 여름엔 조금만 두면 잔디가 쑥쑥, 정말 쑥쑥 자란다. 주민들은 주말과 휴일이면 집 앞 잔디를 깎는 게 일이다. 잔디 깎는 게 생각보다 힘도 들고 요령도 필요한 일이라 사람을 사서 처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이 소리가 진짜 시끄럽긴 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요즘엔 거의 매일 아침마다 잔디 깎는 소리가 들린다. 공공주택이니 용역업체 사람이 와서 큰 기계를 돌리는데,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웬만한 도시소음보다 커서 거슬리는 게 사실이다. 빨리 끝나는 작업도 아니라 오전 내내 기계 소리가 동네를 울린다. 하지만 어쩌랴. 오늘 깎아도 하룻밤 자고 나면 수풀이 돼 있는 것을….
나무가 많으니 가을~겨울이면 낙엽들이 쌓이다 못해 파도처럼 일렁인다. 보기엔 알록달록 색깔도 예쁘고, 운치를 더한다.
하지만 한동안 내버려 두면 걸을 때 방해가 될 정도로 쌓이고 덮이기 때문에 치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市)나 카운티에선 물론이고, 개인들도 우리가 눈을 치우듯 집 앞에 쌓인 낙엽들을 개인 기계를 사서 치운다. 아주 센 바람으로 낙엽 무더기를 날리는 건데 이 소리가 천둥소리 같다. 너무 시끄러워 컨디션이 좀 안 좋은 날엔 온 머리가 지끈거린다.
<납치·기상 경보>
미국에 온 뒤 당연히 미국 이동통신사에 가입했는데, 날카로운 경고음이 멈추지 않고 울리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도 핸드폰으로 안전과 관련한 각종 알람이 오지만 ‘AMBER Alert’란 건 여기서 처음 받아봤다.
missing person, 그러니까 실종된 사람을 찾는다는 메시지인데 납치와 유괴가 많다. 알람에는 사건이 발생한 지역과 용의자의 것으로 의심되는 차량 정보가 적혀있다. 신고해 달라는 거다.
미국은 워낙 땅덩이가 넓어 CCTV가 없는 곳이 많다. 노스캐롤라이나같이 산과 협곡이 많은 곳은 더욱 그렇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고를 당하고, 실종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알람을 받을 때면 섬찟하다.
기상변화도 격하다. 마치 해안도시처럼 태양과 구름과 하늘의 변화가 심한데(그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여름이나 가을에 날이 궂을 때면 무서울 정도다.
한 번 비가 오면 말 그대로 퍼붓고, 아파트 옥상이 무너질 듯 천둥 번개 벼락이 때리기도 한다. 태풍이 지나가는 경로에 들어갈 때면 거대한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전신주들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어느 하루 몇 시간 비가 왔을 뿐인데, 종종 홍수 범람 경보가 울리기도 한다. 실제 거센 비가 온 다음날 가 보면 멀쩡하던 나무들이 쓰러지고 개울가 판자 다리들이 무너져 내려 여기가 어제 왔던 길이 맞나 싶다.
<가장 먼저 우는 새>
안타깝게도 미국에서도 고질인 불면증을 고치지 못했다. 한국 프로야구를 본다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기를 보며 응원하는 내 습관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여름에 이곳은 오전 6시가 좀 넘으면 날이 밝기 시작한다. 하지만 동트기 훨씬 전인 새벽 4~5시부터 아파트 발코니에서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맑고 높고 아름다운 새소리.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현지 주민에게 참 부지런히도 일찍 우는 새가 있다고 하니, 그게 ‘북부 홍관조(Northern Cardinal)’라고 알려줬다. 미국 북부에 많이 사는 새인데, 만화 캐릭터 ‘앵그리 버드’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실제 산책을 하다보면 이 새가 꽤 눈에 자주 띈다. 이름대로 진홍색의 예쁜 빨간 몸에 팍!! 강력한 검은 눈썹. 주로 가지 위에 있지만, 가끔 땅으로도 내려온다. 오늘 가까이에서 사진찍는 데 성공했다.
<바람소리의 위대함>
지난가을 처음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걷는데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 바로 미친 듯이 장대비가 내리는 소리였다.
‘후드득후드득 쏴아아~~~!!’
우산을 챙기지 않았던 나는 이 엄청난 빗소리에 당황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웬걸. 하늘은 여전히 훤하고 구름만 두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럼 이게 무슨 소리람. 분명 비가 쏟아지는 소린데?
알고 보니 이건 바람소리였다. 워낙 나무가 많아 바람이 수천수만 개의 나뭇 잎사귀들을 훑고 가며 내는 소리였다. 아니다 다를까 눈앞에 중국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나 나올 법한 낙엽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멈춰서서 넋을 놓고 이 모습을 바라봤다.
떨어지는 형형색색의 나뭇잎과 함께…비처럼 파도처럼 가슴마저 통과해 지나가던 그 소리를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