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Jul 31. 2023

8월

벌써 8월이라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벌써 8월이다. 여름은 무서운 계절이다. 살인적인 더위를 비롯해서 뭐 하나 마음에 드는게 없다.


멈출줄 모르고 질주한다. 그런 여름의 속도감에 취약하다. 한 두 번 당한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자빠지고 만다.

내 마음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는 여름. 젠장. 8월이 오는것이 너무 슬퍼 좋아하는 걸 찾아 헤메봤는데, 좋아하는 것 한 줄 적기도 힘들더라.


나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도 지쳐있었다. 회사는 돈을 버는 행위를 하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오랜 벗들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이건 내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취를 감춘것일지도)


땅굴속으로 파고들수록 다시 나올땐 외롭고 멀다. 라는 이야기를 상담선생님과 했다. 구구절절 맞는말이다. 혼자인건 편하다.

편한건 상처받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건 내가 나여도 된다는 뜻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하지만, 혼자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꼭 함께 해야만 한다. 그게 바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약속이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어른이 됐음을 의미한다. 이걸 너무 잘 알면서도 나는 불어터진 라면 처럼 손발은 팅팅 불어가고, 마음은 국물처럼 쪼그라든다.

아아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픈일인가. 차라리 더 불어터져서 온 세상을 덮어버리고 싶다 굵은 면발로. 모두가 면발속에 살자. 모두가 동굴속으로 들어가자.


그래도 사람은 살아가기 위한 시스템이 구축 된건지, 내가 이모양으로 생겨먹은건지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영화 <안녕, 헤이즐>은 참 의미 깊은 영화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내용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주와 남주가 서로 사랑하고, 슬퍼하고, 살아가는 그런 내용이다.


나는 이영화를 지금과 비슷한 상태에서 보게되었다. 무료하고, 인생은 거짓말이고, 나에게 남은건 바닥뿐이고. 언제 깨질지 빨리 머리통이 터졌으면 좋겠는데 자꾸 하강만 할 때 이영화를 봤다. 엄마가 죽고 두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직은 내 안에서 죽음이라는 게 성립이 쉽게 되지 않았을 때.

어쩌면 삶도 아직 잘 모를때. 그럴 때의 이야기다.


엄마가 세상에 없는데도 나는 밥만 잘먹고 잠만 잘잤다. 초반에야 잠을 설치고 밥을 건너뛰었으나. 곧 산사람은 살아야지. 넌 잘 해낼거야. 라는 엄마의 말을 이해라도 하듯 밥도 잘먹고 잠도 잘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허함과 무료함이 밀려왔다. 이제 박터지게 싸우던 사람도 없고, 나한테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시원하면서도 섭섭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감정을 손장난으로 자꾸 밀쳐보아도 그것은 파도처럼 자꾸만 나를 덮쳤다.


눈물도 안났다. 장례식 장에서 오히려 친구들이 눈물방울을 달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나는 가만히 서있다 절을 하고 맞절을 하느라 멍이 든 무릎만 아팠다. 친한친구가 끝까지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장례식장에서 같이 잤는데,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울고있었다. 그 친구의 눈물을 보면서도 나는 눈물이 안났다. 아마 어딘가 고장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를 염을 하는 과정에서도 눈물이 안났고, 엄마를 관에 넣고 이제 하고싶은 말을 하세요. 할때도 오히려 씩씩하게 말한다고 대단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다 운구차를 끌고 집으로 향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만 천천히 가달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가 용케 알아듣고 여기서 조금만 멈춰주실래요? 라고 말했고 그 말을 끝으로 오열했다. 몇일간의 일들이, 아득해보였던 일들이 피부로 확 다가온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엄마 없이 살아야하는구나. 우리 같이 집에 갈 수 없겠구나. 단순한 사실이 나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다. 너무 슬프면 때로는 울수도 없을만큼 슬프다가, 제어도 안될만큼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 이후였다. 그 이후로는 다시 눈물이 안났다. 근데 늘 눈물이 차오른 사람처럼 굴었다. 심장께가 자꾸만 미식거리고 체기가 올라온것 처럼 뭉쳐있고 그랬다. 그게 눈물이 쌓여 그랬을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냥 슬픔이 이대로 지나가는 사람처럼 굴었다. 미칠듯 아플 땐 더 많이 울어도 되는줄을 모르고 미련하게 눈물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쏟아질듯 쏟아지지 않는 사람인채로 그리하여 아슬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것이다 <안녕, 헤이즐> 이란 영화를. 그리고 어김없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오열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지 말지는 결정할 수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결정할 수 있다. 나는 그게 너여서 행복하다. 너도 그렇지?' 그래, 나는 엄마로 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그게 엄마여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엄마니까. 그러자 우주만큼 커다랗던 상처들이 우주의 먼지만큼 멀어지기 시작했다. 엄마 없이도 나는 엄마와 화해할 수 있었다.


우주의 먼지만큼 작은 상처도 우주같이 느껴지는 8월에 다시금 영화를 꺼내어 볼까 한다. 나는 왜 상처받고 있으며, 누군가로부터 상처받는가. 그리고 우리는 내일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찌는듯한 더위를 넘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를 매일같이 상상하며 하루에 하나씩 상처받는다. 그리고 그 상처 중 어떤 상처는 의미 있는 상처가 될 것이다. 아참, 나이가 든다는 건 자꾸 이해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인데.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게 아니야' 라는 노랫말을 멋대로 떠올리곤 감히 이해해 본다. 아직 사랑할게 많아서 더 상처받는 8월이다.


작가의 이전글 넝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