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너를 응원하는 따뜻한 마음.
프리지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꽃다발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따뜻한 색감에 매료당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노란색이 나에게 속삭였다. 축하해. 새로운 시작의 두려움과 떨림을 도무지 설렘으로 바꿀 줄 몰랐던 소심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처음으로 힘찬 응원을 말해준 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입학 시즌이 되는 봄이 다가오면 프리지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제일 많이 쓰이는 꽃이기도 하다. 또한 어쩐지 봄 햇살을 느끼게 하는 색 덕분인지 봄꽃 하면 프리지아를 많이들 떠올린다. 너무 아름다운 꽃은 향기가 없는 경우도 많은데 프리지아는 향기마저 좋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저번에 언급했던 나의 최애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도 나오지만 노란색은 희망을 상징한다. 주인공인 장재열이 노란색 수건을 쓰고 노란색 배경에 있을 때는 언제나 고통이 따르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희망을 가로지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의미를 알고 나서는 더 운명처럼 느껴졌다. 희망의 꽃이자, 응원의 꽃 그리고 따스함의 대명사라니! 그렇게 나의 프리지아 덕질은 향수까지 집착하게 만들어 좋아하는 향도 조말론의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다.
완벽한 프리지아 향은 아니지만 호불호가 없을 만한 따스한 향이면서도 시원한 배향이 어우러진 향기이니 관심이 있다면 언젠가 써보시길.(물론 조말론과 나는 아무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봄이 되면 프리지아를 종종 사곤 한다. 남대문의 꽃시장에 가서 몇 단씩 신문지에 싸서 사온적도 있고, 그냥 동네 꽃집에서 한단만 간단히 사서 꽂아두기도 한다. 그러다가 최근에 세상이 편리해져 카톡으로도 꽃다발을 주문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프리지아 꽃다발을 나에게 선물했다. 이번 봄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너를 응원해. 봄이니까 우리 다시 출발해보자. 그러던 중 나의 대학 동기인 J가 생각났다. J는 대학시절 나와 같이 필름 사진 동아리를 함께 한 친구이자, 여러 공모전에도 같이 참여하고, 취업동아리도 같이 듣던 추억의 여러 부분을 차지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졸업 후 사는 게 바쁘고 서로 지역이 멀어 시간을 내기가 참 힘들어 자주 보지는 못했었다. 어릴 때 나는 친구도 안 만나고 가족이 전부인 엄마가 이해가 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 엄마 친구가 있기는 해?'
'그럼. 엄마도 친구 있지. 친구 없는 사람도 있을까 봐?'
'그래. 나도 기억나 어릴 때 자주 놀러 오던 이모들 있었잖아 엄마 포함해서 3명.
그런데 왜 요즘은 잘 안 만나는 거야? 친구도 좀 만나고 그래. 좀 놀아 엄마도.'
'있잖아, 혜진아. 이게 살다 보면 한쪽이 죽을 듯이 노력한다고 해서 다 이뤄지진 않아.
특히 친구라는 건 참 힘들어. 각자 사는 게 너무 바쁘잖아.
그리고 내가 힘들 때 마음이 힘들어서 친구를 못 볼 수도 있지.
그런데 반대로 친구가 힘들 때 또 나를 원치 않을 수도 있고.
근데 그런 흐름이 똑같길 바라는 게 욕심일 뿐더러, 그런 흐름을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다 보면 멀어지는 거야.. 원치 않아도 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거는 진짜로 안 친해서 그런 거 아니야? 난 죽을 듯이 노력할 거야.
끝까지 우정을 지켜내면 되는 거잖아. 가장 최우선으로 두고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네가 되는지'
'그래, 엄마가 지켜봐. 나는 꼭 할 거니까.'
너무도 쉽게 단언할 수 있던 시절이 때로는 그립기도, 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너무 인생을 모르면서 아는 체했고 자신 만만 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원치 않는 이별은 하지 않을 줄 알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날 줄 알았고, 여유롭고 행복이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나는 어쩔 땐 우울함에 빠져 허덕거리는 불쌍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싫은 사람 눈치를 보며 좋아하는 사람보다 얼굴을 더 많이 맞대고 일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은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했다. 내가 잘하면 다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마냥 잘하지도 못했고, 잘해도 멀어져만 갔다. 잡으려 애쓸수록 외롭고 나약해졌다.
나의 대학 동기 J는 앞서 말한 그러한 이유로 2년 반 가까이 만나지 않았던 친구이다. 서로 힘든 일이 많았다. 그녀와 나는. 그러다 보니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힘들고 행복한 그 흐름이 맞더라도 우리는 멀어져 갈 수도 있다. 정말 힘들면 힘든 사람은 보기가 싫다. 동족 혐오라고나 할까. 내가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어도 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진심으로 대하면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오만함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오만함을 내려놓는 연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러다 영영 멀어질 것 같아 안부 차 내가 연락을 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쉽게 만남이 결정되었다. 서울의 한 맥주 집에서 서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먹태를 뜯으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랜만의 만남 치고는 무드 없는 만남이기는 했다. 그때 왜 였을까. 아무에게도 쉽사리 말하지 못하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을 갑자기 툭 던졌다. 위로받고 싶었나. 알아주길 바랐나. 둘 다인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웬만해선 나의 고민을 잘 털어놓질 않는다. 내가 나약해지는 기분이 드는 게 싫기 때문이다. 항상 주문처럼 외웠었다. 더 강해져야 해. 포기하지 마. 더 가야 해. 아빠가 네 앞에 무릎 꿇을 때까지. 독하게 살아남아. 그러려면 누구한테 기대는 게 아니라 그냥 혼자 꼿꼿하게 서야 해. 아마 내가 그때 이야기를 했을 때는 약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강해지기를 잠시 포기했을 것이다. 정말 참지 못할 때 그럴 때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힘들었어.라고 이야기를 끝맺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너 지금 우는 거야? 왜 그래, 취한 거 아니지? 나의 장난에도 친구는 정말 펑펑 울었다.
아니, 너 그렇게 힘들었니, 그런 생각을 왜 했어.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 왜 말을 안 해 너는. 왜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하고 혼자 견디고 있냐고. 도대체 왜 그런 나쁜 생각까지 할 정도로 힘든데 말을 안 하냐고...
친구는 한참을 울 더니 갑자기 약속 하나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들은 나는 역시 내가 왜 이 친구와 대학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도. 내가 이런 친구를 가졌으니 나도 좀 좋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친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힘내, 포기하지 말기로 해. 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말기로 약속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랬다면 당연히 고마운 마음은 들지만 진짜로 힘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는 뭐라고 말했냐면.
이제부터 한 달 내내 나와 전화하기로 약속해. 하루는 네가 걸고 하루는 내가 걸고 그렇게 하는 거야. 무조건 전화할 거야. 단 1분이라도 전화할 거야. 너 퇴근할 때 걸어가면서 전화해. 아니면 씻고 나서 자기 전이든. 언제든 받을 테니까 그렇게 한 달 동안 전화해. 그러면서 나랑 같이 이야기하면서 살아. 얼른 손 줘. 친구는 울면 서도 내손을 끌고 야무지게 엄지 도장까지 찍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내가 웃음이 터졌고, 친구는 웃지 말라며 또 울었다.
그리고 나는 한 달 동안 퇴근길을 그녀와 함께 했다.
내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덜 외로웠다. 덜 힘들었다.
그리고 덜 미쳐갔다.
그 한 달로 인해 내가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되어 우울증이란 걸 아예 몰라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한 달만큼은 나를 살고 싶어 지게 했다.
그녀가 나의 프리지아였다.
그래서 어제 내 프리지아를 구매하면서 카톡으로 그녀에게도 프리지아를 선물했다. 그리고 이렇게 보냈다. '봄을 느꼈으면 좋겠어. 나에게 선물하기를 했다가 문득 네가 떠올라서 너에게도 선물해. 잠시나마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자 엉뚱한 그녀는 이렇게 답이 왔다. '뭐야 이거? 혹시 만우절 링크야??'
어제는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나는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빵 터지고 말았다. 만우절은 생각도 못했는데. 진짜 엉뚱해.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만우절 아니야~ 진짜 선물이야. 정말 네가 생각나서 그랬어. 꽃을 한 번 선물하고 싶었거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누르면 진짜로 주소 적는 링크 나와. 예쁘게 받았으면 좋겠다.'
그제 서야 친구는 고맙 다며 감동이라고 하트를 날렸다.
아직 내가 친구들을 비롯한 소중한 인연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고민하지만, 그들이 내게 준 마음을 우선 다 갚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언제 어떤 이유로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내 온 마음을 다해 표현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올해 봄 내가 다짐한 새 출발의 마음이다. 후회를 남기지 말자.
거짓말 같이 아름다운 봄날에 순수한 진심만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어도 내 사람들에게만큼은 프리지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프리지아의 꽃말처럼 천진난만하게 당신의 앞날을 응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