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생이 벌처럼 느껴질 때
병원에 가게 되면 선생님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은 단연 혜진 씨 본인을 좀 더 아껴주세요.라는 말이다. 늘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박한 기준을 세우지 마세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고요,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예요. 괜찮아지려고 노력도 하지 말고요. 가끔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나고 지난날에 화가 나면 인정해주세요. 23살의 혜진 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자꾸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힘든 거예요. 그때의 혜진 씨는 아직 거기에 상처 받은 채로 남아있는데 혜진 씨 마저 그 감정을 부정하면서, 우는 건 약한 거야, 잊지 못하면 안 돼. 하면서 애써 묻어두고 지나가려 하지 마세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슬퍼도, 화가 나도, 억울해도. 감정은 죄가 없어요.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기가 참 애매했다. 엄마가 아플 때 그 여자가 생겼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시기였다. 아직 49제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아빠가 잠들었을 때 몰래 핸드폰을 가져와 카톡을 열어보던 날. 내가 모르는 아줌마가 카톡방에 '혜진이는 자?'라는 대화를 보낸 걸 확인했을 때. 왜인지 나는 엄마가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이던 아빠를 왜 나는 모른 척했는가. 엄마랑 다르게 나에게 숨겨둔 비상금으로 내가 원하는 씨디며 엠피쓰리며 카메라며 좋은 물건들을 사주어서? 23년을 살 부딪히고 살았지만 내가 아빠를 하나도 모르는구나 라는 생각에 절망감에 빠졌다.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물론 충격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아빠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다. 엄마는 나와 수 없이 부딪혔으나 감정에 솔직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만 보면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항상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철저하게 숨기고 거짓으로 꾸며낼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늘 부재중이었다. 건축 일을 했던 아빠는 해외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경우가 정말 잦았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2~3년씩 해외에서 체류했다. 아빠가 돌아오면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가 졸업을 했고 다시 중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생이 될 정도로 아빠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손에 꼽는다. 그래서 사실 어릴 때는 아빠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오랜만에 귀국을 해서 집에 오면 오히려 불편했다. 집에 외부인이 들어온 느낌. 가뜩이나 말 수가 없던 나는 아빠가 오면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나보다 숫기가 더 없는 동생은 아예 곁에 가지도 않았다. 엄마는 그게 너무나 신경이 쓰였는지 의도적으로 나에게 아빠한테 가서 말을 걸라고 주문을 내렸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면 반드시 아빠와 나, 엄마와 동생 이렇게 짝을 지어 사진을 찍었다. 나도 엄마가 더 좋았는데 언제나 나는 아빠와 짝을 짓도록 했다. 그렇게 억지로 짝을 지어도 너무 어색해서 할 말도 없었는데, 커가면서 내가 엄마와 부딪히며 힘들어할 때 아빠가 위로를 많이 해줬었다. 그래서 내가 참 많이 좋아했었다. 두 번 다시 말할 일 없는 문장이 되어버렸지만.
집 전화에 길고 긴 국제전화번호가 뜨면 우리 집은 모두 초 긴장상태가 된다. 그리고 바로 수화기를 드는 것과 동시에 통화 녹음 버튼을 누른다. 스피커 모드로 해놓고 재잘재잘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사우디의 날씨는 덥지 않은지, 많이 탔는지, 우리가 보고 싶진 않은지 늘어놓는다. 그러면 아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공부는 잘하는지, 딸들이 너무 보고 싶고, 엄마 말을 잘 들으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렇게 전화가 온 날은 엄마는 마음이 외로워지는지 우리들을 부르곤 했다. 우리 다 같이 잘까? 엄마, 동생, 나 셋이 쪼르르 누워서 천장을 보면서 아빠가 고생해서 어떡하지 하며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엄마가 우리 통화 녹음한 거 다시 한번 듣자. 하면 일어나서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아빠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그리고 깔깔 웃다가 엄마가 또 우리 한 번만 더 들을까? 하면 또다시 누른다. 그리고 점점 물기 어린 목소리가 되어 우리 마지막으로 또 들을까? 그러면 나는 또 투덜대며 이제 마지막이야 하면서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르고…
아빠가 중국에서 체류할 때였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고 처음으로 내가 먼저 아빠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항상 아빠가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렸었는데, 그날은 전화를 걸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빠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 그냥 한국에 오면 안 될까? 나도 아빠 너무 보고 싶어. 오늘 학교 끝나고 가는데 다른 애들은 야자 끝나고 아빠가 데리러 오더라. 그거 보니까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리고 아빠, 고등학생 되니까 엄마랑 더 싸우는 것 같아. 나 너무 힘들어. 내 편이 아무도 없잖아. 아빠가 와서 좀 내 편도 들어주고 해 주라. 다짜고짜 전화해서 엉엉 우는 나를 아빠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중간중간 울지 말라는 소리만 하고 뭐라고 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아빠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너무 반응이 없어서 어쩔 땐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있어? 하게끔 만드는데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지키곤 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참아 아빠가 최대한 마무리 짓고 이거 마무리 지으면 한국에서 일할게. 3개월 뒤 아빠는 정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했다. 한 때는 내가 정말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다. 엄마와 다르게 들어주고 기다려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아빠와 나는 서로를 너무 몰랐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엄마가 사라진 후 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자가 생겼지? 내가 카톡도 보고 다 확인했어. 아빠, 아빠가 사람이야? 난 솔직히 우리 어릴 때 바람 폈던 거 알고 있었어. 내가 그런데도 아빠를 엄마보다 믿고 따랐어. 더 좋아했었다고. 그런 나한테 이렇게 배신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난 아빠가 엄마한테 순정을 바칠 거라는 기대도 안 했어. 아빠가 그런 타입이 절대 아니니까. 아빠 사실 이기적이잖아. 내가 아빠를 닮아서 이기적인 거고. 그러니 언젠가는 여자를 만날 거라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되면 든든할 것 같았고. 내가 딸로서 채워주는 거랑은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라는 생각까지 했었어. 그렇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엄마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거야 지금? 아직 몇 달 지나지도 않았어. 심지어 시기도 보니까 엄마 아플 때야. 난 그때부터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소설 쓰지 마. 네 엄마 닮아서 너는 참 똑같구나. 엄마도 항상 혼자 소설 쓰고 혼자 상상하고 사람 몰아가고 그렇게 했었잖아.
이런 식으로 엄마한테도 대했어 그동안? 그래서 엄마가 맘고생했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도대체. 미친 거야? 진짜 아빠는 사람도 아냐. 네가 사람이냐고 도대체! 할 수만 있다면 내 몸에 피를 다 뽑아버리고 싶어. 내가 아빠 딸인 것도 싫어. 창피해. 창피해서 미칠 것 같아.
너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미쳤어 너야 말로? 어디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그리고 너야 말로 왜 이제 와서 착한 척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야 말로 왜 엄마를 갑자기 위하는 척하냐고. 너 살아있었을 때 엄마랑 엄청 싸웠잖아. 솔직히 네가 속 썩인 게 더 크지. 딸이 부모한테 그렇게 대못 박은 건 원래 잊히지가 않는 법이야. 잘 생각해봐 네가 엄마를 죽였잖아.
네가 엄마를 죽였잖아.
네가 엄마를 죽였잖아.
네가 엄마를 죽였잖아.
장례식장 내내 머릿속에 이미 가득 찬 생각이었다. 조문객을 맞으면서 난 사실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다. 친척 어른들, 친구들 모두가 나에게 고생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넬 때, 나는 너무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못해서 엄마가 죽은 것만 같은데. 이 자리에 지금 있어도 될까. 너무나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병간호를 마지막까지 같이 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걸 후회했다. 내가 아닌 동생이 옆에서 같이 있어줬다면 엄마가 더 오래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를 닮아 너무 이기적이다. 매일 병원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더 큰 것과 싸우는데도 나는 내 생각만 했다. 어느 날 집에 와서 밀린 집안일을 하는데 하필이면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 당장 병원에 옷도 가져가야 해서 손빨래를 쪼그려 앉아서 하는데,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 건가. 조금 있으면 졸업반인데, 취직 준비도 해야 하고 복학을 해야 하는데 복학할 등록금은 또 어떻게 모으지. 그리고 친구들하고는 이미 모두 연락을 끊은 지도 오래였기 때문에 갑자기 나갈 수 없는 상자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세상과 단절되어 영영 갇히면 어떡하나. 엄마가 아픈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였다. 마지막까지 나는 나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내가 죽였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아무리 상담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해도 난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선생님은 늘 아니라고 틀리다고 말한다. 나는 그럼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 그러나 마음이 따라오질 못한다. 마음은 자꾸 23살의 나로 돌아간다. 선생님은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불렀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이 트라우마에 대하여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막에 있는 낙타를 한낮에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고 다리를 묶어 놓고 밤에는 줄을 풀어놓는다. 하지만 낙타는 나무 막대기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땡볕에서 긴 시간 다리가 묶여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로워진 밤에도 그 장소를 떠날 수 없다. 그게 바로 트라우마다.
내가 죽였다는 죄책감과 가족이 나에게 그래 네가 죽였어.라고 말한 상황이 합쳐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나에게는 진짜로 내가 죽였다는 생각이 다리를 묶어버렸다. 선생님이 아무리 혜진 씨의 어머니는 암 때문에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말은 홧김에 내뱉은 말이고, 굉장히 잘못된 말이기 때문에 혜진 씨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난 아직도 막대기 근처이다.
엄마가 죽은 시점부터. 사막에 서있는 목마른 낙타의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갈증이 가득한 채로 살았다. 나에게 남겨진 삶이 벌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어려운 일이 있다. 그냥 삶을 깔아뭉개버리고 앉아버리고 싶은 일. 그런 일은 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단순히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일. 다리가 부러져서 뼈가 산산조각 나는 게 느껴지고 살은 찢길 때로 찢겨서 너덜너덜 해지고 피는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철철 흐르는데 아픈 건 둘째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기분. 도와달라고 주변을 둘러봐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피가 흐르는 채로 걸어갈 수도 없는. 더 이상 구조요청을 하기도 싫고 상처를 치료하기도 싫어서 그냥 앉아서 여분의 삶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
낙타가 물 없이 사막에서 최대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20일 정도라고 한다. 나무에 묶인 낙타도 한 달에 한 번은 물을 저장해야만 한다. 나에게 남은 여분의 시간을 아무리 뭉개버리려고 해도 그 괴로운 시간마저 껴안으며 살아가야 한다. 심지어 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약을 먹으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그것은 약을 먹지 않는 사람들도 어려운 일이다. 단 한 번에 완벽하게 사랑해주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엄마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게 변하지 않아도 좋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자꾸 생각나도 상관없다.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상 그때의 사막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다만 남은 생을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엄마를 위해 살아보겠다는 이 마음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이미 충분히 나를 위해 살았으니 남은 생 엄마를 위해서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마 아빠가 그 카톡의 아줌마랑 가게를 차리던 날이었던 것 같다. 마음 같아선 그 아줌마의 머리채를 잡거나 아빠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다만 다짐했을 뿐이었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내가 살아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이게 내 삶이다. 보잘것없는 나의 이야기의 전부이다.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첫 번째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쓰면서 감정을 덜어내기 위함이다. 어쨌든 글을 쓰다 보면 많이 울기도 하지만 눈물 쪽 빼고 다시 글을 이성적으로 써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서 과거의 감정이 많이 정리가 된다. 나는 글쓰기를 나를 위해 한다. 참 웃기게도 인생은 엄마를 위해 살고 글은 나를 위해 쓴다.
두 번째는 만약 나와 같은 케이스가 있다면, 이런 사연이 같은 게 아니더라도 나와 같은 마음. 피 철철 흘리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흔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반드시 도움을 요청하라는 의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정신건강검진센터를 이용했다. 요새는 코로나 블루로 인하여 시에서 정신건강검진센터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무료로 상담을 예약할 수 있다. 만약 시에서 운영하는 게 없다면 용기 내어 정신과 진료를 추천한다. 문턱이 높아서 그렇지 막상 가면 감기로 약 타는 것과 진배없다. 정말 사람 바글바글한 그저 병원이다. 병원도 막막하다면 주변의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아니면 가족에게 말하거나. 절대 혼자 품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남은 생이 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우리 아주 작은 이유라도 다 뒤져서 찾아보자. 원래 삶의 이유는 누구나 찾기 힘든 법이다. 옷을 사도 사도 올해도 입을 게 없네!라고 외치는 것처럼 정말 샅샅이 뒤져야만 찾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저 깊은 옷장 속 입을 만한 옷 한 개 라도 찾아보자 하는 심정으로 케케묵은 마음을 환기시키고 발굴해보자. 찾아도 찾아도 없다면 침대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겠지만 큰 맘먹고 밖으로 나가보자. 네모나고 길쭉한 한 칸에서만 벗어나도 소담스러운 꽃 봉오리들이 작은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날이 좋으니까, 밥이 맛있으니까, 티브이가 재밌으니까, 오늘 잠을 실컷 잤으니까, 일찍 일어났으니까, 하루에 세끼 먹었으니까. 사소한 거에 이유를 붙여서 조금조금 연장하자. 함께 살아보자.
내가 들었던 말을 돌려주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언제나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살아있어서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