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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Apr 09. 2021

아름다움으로부터

어둠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거예요


  매일 아침 겨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허겁지겁 지하철에 올라타 자리가 나면 앉아서 꾸벅꾸벅 졸거나, 자리가 나지 않으면 서서 잠을 자는 묘기를 부릴 줄 알았던 지난 회사의 출근길. 그래서 벚꽃 따위는 신경 쓸 여력이 없던 봄날과 달리 이번 봄은 원 없이 봄을 만끽하고 있다. 30분을 걸어서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생명력이 넘친다. 우선,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지나친다. 마스크를 쓰고도 까르륵 웃어넘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뭉클해진다. 너무 오래된 과거는 전생처럼 느껴진다는데, 내가 저렇게 작았을 때의 모습이 어느덧 그렇다. 마치 전생의 이야기처럼 믿기지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이 길을 지나 매일 출근을 하는 어른이 되어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저 교문 너머의 시간들이 진정으로 존재하긴 했었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신호등에 다다르면 바로 한 아름 피어난 벚꽃 송이들을 만나게 된다.

  탐스럽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며 새삼 깨닫게 된다. 흔히 쓰던 단어의 의미들을 다시금 절감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언어의 생명력은 진정으로 쓰이고 깨달아야만 가능하다는 걸 떠올린다. 그런 생명력을 불어넣는 문장을 쓰고 싶다. 돋아나는 꽃잎들을 보며 매일 아침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분들이 신호에 맞춰서 깃발을 들어주시면 웅장한 발걸음으로 힘차게 한 발씩 내딛는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어려운 한 가지의 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진정으로 쓰일 수 있는 생명력이 넘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실 내가 본 풍경 때문에 이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사로 가는 길을 따라 20분가량 계속해서 벚꽃 길을 마주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벚꽃 길 자체로도 행운의 출근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때마침 오늘은 바람이 적당히 부는 아침이었다. 바람을 맞은 벚꽃은 한 폭의 그림처럼 바람에 나부끼며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봄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꽃잎들이 퐁퐁. 나도 모르게 꽃잎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가 거두었다. 감히 아름다움을 잡으려는 게 욕심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늘 아침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차마 사진을 찍으려 하지도 않았다. 사진으로 찍힌 벚꽃나무는 내가 본 것일 테지만 실존하는 벚꽃나무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풍경은 오늘 아침 4월 9일 8시 50분에 보지 않았다면 유효하지 않는다.

  내가 화가였다면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아름다움은 실제로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아름다워서 그 찰나를 가둬두고 싶은 순간이 온다. 그래서 그림으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치유의 순간은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심미적인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이 가진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예쁘다, 잘생겼다. 보다도 좀 더 큰 차원의 아름다움. 자연이나 예술이 주는 웅장함과 압도적인 느낌들에 포획되는 순간이 있다. 오늘 우연히 마주친 벚꽃의 향연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네는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수련 연작에 바쳤다. 손수 정원을 만들고 수련을 키우며 빛에 따라, 시간에 따라, 물에 따라, 대기의 흐름에 따라 수련을 연작해서 그린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골몰하고 있을 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네에게는 어떻게든 하루하루 달라지는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 하루가 다르게 탐스럽게 커져가는 봉오리. 그 순간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은 마음. 실제로 물과 그 위에 반사되는 풍경은 하나의 집착까지 되었다고 말하며 어떻게든 그려내고 싶은 마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동시에 환희가 차오르는 과정을 겪었으리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에 가득 차서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않고 불결하고 더러워.라고 비난할 때도 있지만, 결국에 위로받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찼을 때, 사랑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도 결국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아주 작아서 먼지 같다고 느낄 정도로 하찮게 느낄지 몰라도 그 작은 사랑. 사랑만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 비관적인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런 이유이다. 지금은 그저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스스로를 위한 글만 쓰지만. 언젠가는 세상에 있는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싶다. 아직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고. 사랑이 있는 글과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 때 전시회를 자주 간다.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서다. 그림이 주는 색채와 압도적인 터치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매료되어 잠시 현실과 유리된 느낌을 받는다. 전시회를 다 보고 나오면 머릿속이 정리된다. 마치 컴퓨터가 한 달에 한번 알약으로 청소를 하듯, 내 머릿속 불필요한 프로그램 제거와 같은 느낌이다. 지금까지 갔던 전시 중 가장 청소를 확실하게 해 준 전시가 있는데, 마크 로스코의 전시이다. 마크 로스코는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캔버스에 커다랗고 모호한 색면과 불분명한 경계선만으로 그림을 표현하는 색면 화가이다. 한마디로 캔버스 가득 주황색을 가득 칠하고 3:5 정도의 비율로 나눈 뒤 위의 3은 다시 노란색을 칠하고 아래의 5는 더 진한 주황색을 칠하는 방식이다. '색채 덩어리' 로만 표현을 하는 작가이다. 단순하게 색만 가득 칠해진 작품을 보고 얼핏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보면 그 거대한 캔버스에 거대하게 가득 칠해진 색깔이 압도적이다. 내가 색에 다가가는 게 아니라 색이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고 표현을 하고, 보고 있자면 정신적 탐구를 하게 된다는 게 이 작가의 매력이다.

  그중 전시회 마지막 즈음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 작품인데, 캔버스 한가득 빨간색으로 물들인 작품이 있었다. 가운데만 희미하게 하얀 경계선이 있고 온통 빨간색이었다. 그 큰 캔버스가 마치 핏빛처럼 강렬한 빨간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분명 그림은 물감으로 그려서 이미 굳어진 상태로 눈앞에 있는데 어쩐지 빨간색 피가 계속해서 뚝뚝 캔버스 끝을 타고 내려와 결국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빨간색은 마크 로스코가 마지막에 사용한 색이라고 한다. 어쩐지 압도당해 그 앞에서 한참을 오랫동안 서있었다. 무언가 가슴 안에 꽉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강렬한 그 색이 주는 느낌이 알 수 없는 그 느낌이 나를 묶어버렸다.

작품 옆 안내에 마크 로스코의 마지막 유작이었고 그가 자살했음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인생에서 두려운 것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리는 것이야'

자신을 점차 삼켜오는 어둠 속에서도 울렁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밑바닥의 영혼까지 예술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 그와 같이 까만 어둠이 다가오는 것이 무서웠던 나에게 그날 그의 빨간 영혼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마치 아직 너는 잠식되려면 멀었어.  강렬하게 무언가를 남기려고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니? 그날 마음속으로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을 하였다. 훗날 영혼을  바칠 일을 하나 해보자고. 그게 지금 글이 될지 뭐가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은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어쨌든, 깊은 밤이 오래될수록 날이 밝아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면 더 깊이 빠져버리고 만다. 진창 속에 있어서 미칠 것 같더라도 기어서라도 조금씩 나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와서 한 번쯤 맨땅도 밟아보고, 풀 냄새도 맡아보고, 때 맞춰 자라난 들꽃과 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까지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운이 좋으면 벚꽃 눈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지옥 같기에 내일도 모레도 작은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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