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기록
왜 글을 쓰세요?라고 묻는다면 단지 매일 기록하기 위해서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병원에 다닌 이후로 매일 일기를 써왔다. 약을 먹고 난 증상을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하는 게 좋다고 하여 시작된 일종의 투병일지는 점점 그날의 감정도 섞이게 되고 주변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세밀화 같은 풍경이 섞이기도 했다. 암울한 날에도 불안한 날에도 그저 써 내려갔다. 쓴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기록한다는 건 나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모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화가 나는가? 그렇다면 왜 화가 났는가. 나는 슬픈가? 절망하는가? 물음표들이 쌓여만 갔다. 감정은 즉각적이라 굳이 물음이 필요 없이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다. 그렇기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물음을 갖는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 이상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감정에도 마치 자격을 부여하는 듯 화조차도 쉽게 낼 수 없었다. 충분히 그러 실만 해요.라는 말을 병원에서 듣고 나서야 비로소 화를 내든 눈물을 흘리든 감정을 표출했다. 그게 너무 답답해 감정에 자신 있게 마침표를 찍기 위해 매일 순간을 기록했다.
모든 순간은 나와의 싸움이다.
이 문제를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잘 견뎌 낼 수 있는지,
지금 이 상황이 두렵고 무섭지만 포기하지 않고
잘 이겨 낼 수 있는지,
설령 내 앞에 닥친 일을 생각했던 것처럼
해결해 내지 못할지라도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안의 나와
줄다리기를 하는 영역이다.
오로지 내 몫이다.
조유미 /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치료의 중반부쯤 기록해 둔 시이다. 마음이 아픔을 겪고 나서 가장 크게 겪은 변화는 공감하는 범위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 유치하고 투박하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용기 있고 강한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변화했다. 포기할 때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정하는 것 역시 나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킬 줄 안다는 것. 다른 누구보다 내 감정을 우선시로 챙긴 뒤에 타인을 돌보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현명하다는 것.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깨닫고 있다. 이는 기록을 통한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 낸 기록물이다. 타인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는 만큼 나와의 시간도 참으로 중요하다. 자신에게 보다 더 매력적인 대화를 걸기 위해 주제를 찾고 문장을 갈고닦는다.
그리고 기록이 주는 가장 좋은 점은 추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로부터 탄생한 이야기를 한참 뒤에 다시 볼 때 다른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내밀하고도 흥미롭게 들리는 경험을 선사해준다. 작년 8월 퓰리처상 사진전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있고 있다가 오늘 일기 속에서 찾아냈다. 사람이 많아 전시회를 정신없이 보아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전시회장 밖에 특별전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하신 분의 사진을 전시해두었다고 한다. 결국 그 분쟁지역에서 작가는 사망을 했고 그 자리엔 마지막 메모가 있었다. ‘인생에서 언젠가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한 방울을 만나게 된다’
메마른 대지 위를 적시는 한 방울처럼 메마른 삶을 적실 수 있는 한 방울을 나도 언젠가 만나게 될까? 사진전도 그렇지만 사실 누군가의 고통의 기록을 보고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기록해야만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해야만 내가 살아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 용기를 준다면 오늘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낸 기분이 들 것 같다. 인생은 모순이니까 나의 괴로움의 기록을 보고 자그마한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감히 영광이겠지.
외로움에 지치고, 사람에게 속고,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모든 지난한 과정을 다들 똑같이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위로가 되고 용기가 생긴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일기는 이렇게 마무리되어있다. 매일매일 최소 에이포 용지 한 장 분량이라도 글을 써보자고 다짐한 것은 올해 3월부터이다. 지금까지 몸이 아파도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썼다. 총 73편이 되었다. 그중 나름 엄선하여 브런치에 올린 글은 40편이 넘었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변덕이 죽을 끓는다는 소리를 달고 살 정도로 한 가지에 끈기 있게 매달리는 성정이 아니다. 쉽게 싫증을 내고 흥미를 잃는다. 그래도 무의미해 보이는 이 몸짓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이미 나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있는 기록이라 말하고 싶다. ‘여행의 목적은 떠나는 데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굳이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기록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감정을 다듬고 일상을 소중하게 기록하는 여정이다. 오늘도 흰색 바탕에 커서가 깜빡이면 글쓰기 여정이 시작된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할 때 부지런히 키보드 위 손가락은 움직인다. 감히 오래도록 이 여정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