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믿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이 믿는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당신은 요정이 있다고 믿는 상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심 한복판에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작은 나비는 보았어도 요정은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이라 헛된 소리 취급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요정을 보았다면? 이때 당신의 결백을 밝힐 방법은 무엇인가.
믿음에 관한 이론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표상주의로 심적 상태의 내재적이고 표상적인 구조가 믿음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정은 주로 저녁 7시에 출몰하며 크기는 나비만 하고 날개가 달린 작은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라는 글을 읽는다. 그리고 그 이후 진짜로 저녁 7시에 나비만 한 사람 모양에 날개를 단 생명체를 본다면 그것을 요정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로써 믿음을 표상하게 된다.
둘째, 성향 주의이다. 요정을 믿는 것은 요정과 관련한 특정한 행위적 성향을 갖는 것이다. 소원을 빌 때 요정이 나타난다든지 어떤 행동으로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지 표상된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해석 주의는 오로지 객관적인 관점으로부터 관찰될 수 있는 행위만이 믿음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누구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요정을 바라볼 수 있고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믿음이 객관적이고도 외부적으로 목격 가능한 것이면 참 좋겠지만, 목격하지 못하는 내재적인 믿음이 우리에겐 더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 어디 한번 다 꺼내서 보여줘?라고 아무리 말해도 우리에겐 심장을 갈라서 열어 볼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리고 수많은 사건 사고들. 제가 범인이 아닙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 증거를 가져다 대곤 한다. 최면 수사를 하거나 흉기를 찾거나 걸음걸이를 분석하거나. 또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늠하기 위하여 상대의 행동과 말투 눈빛을 분석한다.
이번엔 물음을 달리하여 믿음은 꼭 실체화되어 눈에 나타나야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애초에 믿음은 실존할 수 있는가? 믿음은 형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하나의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을 우리는 무엇을 보고 겁도 없이 용감하게 믿게 되는 걸까.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는 유령이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모여 유령들에 맞서 싸우는 활극을 담고 있다. 주인공 애비와 에린은 고등학교 때부터 유령을 믿었고 유령에 대한 책을 출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늘 비웃음만 살뿐이었다. 그러다 도시 전체가 유령에게 점령당하고 그것을 대비하고 있던 그들이 유령으로부터 도시를 구해낸다. 말이 되지 않는 설정에 판타지 가득한 cg까지 더해져 단순한 코미디 영화로 즐기면 그만이겠지만, 어쩐지 이 영화를 통해 어떠한 뚝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본인이 믿는 것을 증명해내는 방법은 바로 뚝심이다. 애비와 에린은 유령을 증명하고 세상에 보여주는 일을 오랫동안 꿈꿔온 인물이다. 그 목표를 위해 비록 무모해 보이더라도 유령 전문 회사까지 차려가며 유령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나간다. 그렇기에 좋은 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 악령을 퇴치하기에 이른다. 믿고자 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것은 제일 느리지만 제일 정확하게 믿음을 증명해내는 방법인 것이다. 즉, 내가 믿는 것을 계속 믿는 것. 이게 전부이다.
어린 시절 마법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누가 뭐래도 될 거라는 믿음. 이번엔 아닐 거라 해도 나는 맞을 거라는 믿음. 믿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뭉근하게 끓여낸 초콜릿을 녹여내어 강물을 만들고 그 위에서 배를 타고 요정과 함께 떠내려 갈 수 있음을 믿는다. 중간중간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초콜릿도 먹을 것이다. 될 수 있다면 투명망토를 쓰고 승강장 벽을 뚫어보고 싶기도 하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고스트 버스터즈처럼 멋있게 무기를 휘두르며 정의를 구현하는 여전사가 되고 싶다. 분명 가능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