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지 말아야 할 진실
야근도 많고 업무도 버겁고 사람도 힘들었던 전 회사에서 한 가지 좋았던 기억을 꼽자면 여직원들과 함께했던 독서모임을 꼽을 것이다. 회사에 들어 간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같이 일하던 주임님이 '혜진 씨, 책 좋아한다고 그랬죠? 이번에 회사에서 독서모임을 좀 만들까 하는데 관심 있으면 들어올래요?' 책은 좋아했지만 책을 읽고 같이 토론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로 시작하는 사회생활이니 만큼 도전을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각자 돌아가며 한 달에 한번 책을 정하고 한 달 뒤에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지 토론을 하는 형식이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내가 첫 번째로 제안한 책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였다.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벼르고만 있는 책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에게 그런 책이었다. 또한 다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눠 볼 법한 주제의 책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이야기이다. 15세 소년 동호가 80년 5월 열흘 동안 겪게 되는 일을 아주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써 내려갔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은 많지만 이 책에서 보다 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은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점을 달리하여, 각 시점에서 상황을 서술하기 때문에 보다 더 다양한 창구를 통해 비극을 극대화시켜 무력감을 느끼게끔 만든다.
특히 동호의 친구가 계엄군에 총에 맞아 사망한 뒤 야산에 던져져 자신의 몸 위로 차곡차곡 쌓이는 시신들을 느끼며 공포와 분노의 감정을 표현할 때 차마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의 감정이 밀려온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묘사를 할 수 있을까. 마음이 너무 괴롭지만 그렇기에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을 짚고 있다. 우리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말할 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느 부분은 진실이 너무 두려워 덮어두려 하는 부분을 작가는 가감 없이 확 들춰버린다. 이것은 진실을 마주하기 어렵더라도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일이며, 숨겨야 할 일도 아니며,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정대네 아부지까지 떠나 괴괴한 문간채는 밖에서 자물쇠로 채워버리고, 꾸역꾸역 가게에 나가 장사를 했제. 이름만 걸어놓고 얼굴도 한번 안비쳤던 유족회에 처음 나간 것은, 부회장이란 엄마가 돌린 전화를 받고 서였다이, 그 군인 대통령이 온다고, 그 살인자가 여기로 온다고 해서...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무섭지 않았어야. 죽어도 좋다는 마음인디,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겄냐'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알지만 모른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초석이라는 것을 알지만 얼마나 어렵고도 험난한 과정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기록된 역사를 배웠을 뿐이다. 폭력을 휘두르고 피가 넘실대는 현장에서 우리는 총구와 맞서 싸운 적이 없다. 나의 친구가, 나의 동료가 희생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슴 아픈 죄책감에 밤새 시달리며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그저 하루아침에 주어진 현재를 마음 편히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감히 알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역사를 왜 알아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겪은 적이 없기에 학습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겪은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화 항쟁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그 결과 우리의 광화문 광장은 촛불로 빛났다. 정의가 정의의 이름을 다하지 못할 때 우리는 배운 대로 용기 있게 거리로 나왔다. 때로는 안녕들 하신지 인사말과 함께 대자보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역사를 잊지 않고 지난날의 피와 땀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계승하여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최근 미얀마 시민들에게도 이어지며 계속된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바람대로 평화와 자유가 찾아오길 기도한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힘은 언제나 기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당한 처우와 왜곡된 현상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최근 이러한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드라마를 제작하겠다고 하여 이슈가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드라마는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인데 설정을 비트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냐는 입장도 있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자본 위에 역사가 있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때때로 어떠한 문제들은 그 자체의 존엄성을 훼손하여서는 안 된다. 앞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을 모두가 알지만 동시에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고 말하였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그때의 소녀와 소년들을 다 불러오지 못했다. 모두가 올 때까지 그저 엄숙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리며 제대로 오고 있는지 기다려야만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