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May 20. 2021

되감기를 누르지 마시오

감정은 되감기를 많이 누르지 마세요


  '안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맘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는 고등학생 때 자주 듣던 노래이다. 가수는 제목을 따라간다는데, 앵콜을 바라지 않는다는 제목을 파격적으로 붙여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해서 듣게 되었다. 내용은 끝나버린 노래를 아무리 다시 불러 달라 해도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떠나버리면 앵콜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되감기를 참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는 재탕 삼탕은 기본에 어떤 노래에 꽂히면 무조건 한 곡 반복을 한다. 감정 역시 깊게 우려내는 찻잎처럼 진하게 우려 마시곤 한다. 어떤 이들은 감사하게도 고유의 특성과 감수성이라 이름 붙여주지만, 내가 보기엔 새로운 것을 시도할 줄 모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단단하게 취향으로 쌓아 올린 내공보다도 엉성하게 얽혀있는 나태함에 가깝다. 익숙한 것이 너무나도 편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목록들은 몇 년째 업데이트가 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 나태함의 증거이다.

좋아하는 영화 : 이터널 선샤인, 러브레터, 미스 리틀 선샤인, 안녕 헤이즐, 원더, 인디 에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윤희에게

좋아하는 드라마 : 봄날,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내 이름은 김삼순, 밀회

좋아하는 노래 : 소녀감성 100퍼센트, 원하니까, 있지, 난 행복해, 재연

  반짝반짝 쌓아 올린 취향들을 마르지 않도록 갈고닦는 것은 중요할 테다. 사실 영화, 드라마, 노래를 질리도록 몇 번이고 감상하고 듣는다는 게 뭐가 그리 문제가 되겠느냐 만은 비단 취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감정으로 끌고 올 때 문제는 발생한다.

  취득한 감정들을 길고 깊게 끌고 가는 것을 늘 경계하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스스로도 안타까운 날들이 많다. 마치 오락가락한 요즘의 날씨처럼 어떤 날은 화창한 내가 되었다가 어떤 날은 먹구름 낀 내가 되고 만다. 더욱더 큰 문제는 그 발단이 아주 사소하다는 것이다. 멀쩡하게 약을 잘 챙겨 먹다 물 컵에 찰랑거리는 물이 조금이라도 넘쳐흐르는 날에는 갑자기 눈물이 난다. 작은 실수의 파도는 큰 폭풍처럼 밀려와 이리저리 뒤흔들고 감정을 뿌리째 뽑아버리곤 한다. 누군가에게 지나갈 잔잔한 바람이 나에겐 돌풍이 되는 것도 믿기지 않아 처음엔 그 마저도 곱씹곤 했다. 멈춤, 되감기, 재생, 되감기, 멈춤

  앞서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아빠에 대하여 말한 적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테이프로 음악을 자주 듣곤 했다. 이름 모를 샹송부터 중경삼림 ost '캘리포니아 드림'도 테이프로 들었다.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 되감기는 필수다. 중경삼림 노래가 듣고 싶던 나는 재생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감기를 해서 다시 한 곡 반복을 하곤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되감기를 돌리면 테이프는 이내 늘어져버리고 만다. 늘어져버린 테이프를 살리려고 엄마에게 부탁해 여러 번 테이프 구멍 사이에 연필을 넣고 돌려 살려냈지만 결국 이내 다시 늘어져버리고 말았다.

  감정도 어쩌면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한 번 늘어진 감정의 구간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애써 당겨보아도 다시 팽팽하고도 올곧게 있을 수 없다. 공격에 취약해진 탓에 섬세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종국엔 외부의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니 본인의 소리를 낼 줄도 모르게 된다.

  감정이 자꾸 과거의 일에 멈춘 채 있거나, 되감기를 하려 할 때 현재로 데려오는 연습을 한다. 현재의 흥미로운 것들을 모아서 다시 취향을 바삐 쌓아 올린다. 어느 날인가 몸이 아플수록 본인의 세계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침대 주변의 먼지를 쓸어내야 하고, 잘 차려진 밥상 하나를 차려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세계는 점점 비좁아져 간다는 글이었다.

  세계의 외연을 넓히기 위하여 따뜻한 밥상 하나를 차린다. 소박하지만 갓 지은 밥에 뜨끈한 된장찌개 하나면 나를 위한 첫 세계를 만난다. 그리곤 맘에 드는 노래를 하나 틀어놓고 질리도록 듣는다. 오늘은 글을 쓰며 '앵콜요청금지'를 듣다가 샤이니의 '재연'을 들었다. '익숙함이 준 당연함 속에 우리 사랑은 야윈 달처럼 희미해져' 가사 한 줄에 감탄을 하며 역시는 역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글을 다 쓴 뒤에는 일주일 간 읽겠다고 다짐만 한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을 것이다.

  겹겹이 쌓이는 페스츄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바삭한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최대한 여러 겹의 층과 결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소녀, 소년이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