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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Jun 17. 2021

그녀(  ) 구원자A

3. 도대체 무얼 원하는 건데?


  허리가 잘록한 모양의 빈 음료수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였다. 더위에 약한 그녀가 뙤약볕 아래 무려 30분을 헤맨 끝에 찾은 편의점에서 사 온 종합음료 세트 속 알로에 맛 음료수가 담겨 있던 병이었다. 명색에 의뢰하러 온 입장에서 빈손으로 오긴 뭣하여 음료수를 사 들고 왔으나 더위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는지 바로 A의 손에 의해서 뻥-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더니 마시라며 제게 턱짓을 하며 음료수병을 밀어주어 눈 깜짝할 새 마시게 되었다.


  마시고 나니 주변의 풍경이 슬쩍 눈에 들어오는 그녀였다. 사무실이라 하기엔 책상 두어 개와 자신이 앉아있는 손님 접견용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소파는 가죽이 군데군데 까져있었고 테이블은 유리판 사이에 초록색 부직포 같은 것이 덧대어져 있어 참으로 예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초록색 부직포를 바라보며 빈 음료수병을 살짝 사선으로 세워 유리 테이블 위에 빙글빙글 돌렸다. 계속해서 빙글빙글. 속마음이 복잡할 때 잠시 정신을 다른 차원에 갖다 놓고 멍을 때리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러한 그녀의 속마음 따위는 알 리가 없는 A는 이런 시간 낭비가 싫었다.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의미로 그녀의 앞에 똑똑 주먹으로 노크했다. 그러자 마치 토끼 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로 A를 바라본다.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슬쩍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본론부터 말하죠.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뭘 도와주면 되는 건데요?


  그녀는 살짝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마신 알로에 음료수가 끈적끈적한 괴생물체라도 되는 듯 목을 옥죄어오는 느낌을 애써 떨쳐내며 말을 내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끝마치고 말았다. 그래도 조금은 후련한 느낌이었다. 말로 내뱉으니 어쩐지 명료해진 기분도 들었다. 교과서 지문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은 느낌이랄까. 남편이 바람을 피워요. 직장동료랑 피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뻔뻔하게 집에 들어와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요. 그런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가 따져 묻고 싶었다가, 이유가 저한테 있는 건 아닌지 억지로 찾아보기까지 해요. 그래도 결국 개새끼는 그 자식인데.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아요. 남편에 대한 감정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선명해지는 형광펜. 그 감정은 주로 증오, 미움, 분노, 절망에 밑줄 그어져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A는 간단한 질문을 내뱉었지만, 그녀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네? 원하는 거요..?"


  "결정적 증거를 잡아서 이혼하고 싶어요? 아니면 이혼은 싫고 그냥 잡아다 족쳐줘요? 아니면 상대편 여자에게 접근해서 경고하는 방법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돈이나 왕창 뜯어내는 건데.. 이런 경우에는 위험요소가 있긴 해요 사실.."


  "잠깐만요. 어떻게 해보자는 게 아니고요."


  A의 말을 황급하게 막아선 그녀는 어딘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당장에 이혼을 원하면 남편에게 찾아가면 될 일이었고, 잘못을 따져 묻고 싶으면 남편에게 따져 물으면 될 일이었다. 도대체 제삼자에게 무엇을 부탁하려 여기에 찾아왔는가. 남편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A는 쯧쯧 작게 혀끝을 찬 뒤. 참 세상 물정 모르고 맘이 여린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감정이 먼저여야 하는데, 진정으로 화를 낼 상황에서도 참 이성적 판단을 하려 애쓰는구나. 그럴수록 그녀 자신만 힘들어질 텐데. 괜히 도와준다고 끼어들어 피곤해지는 거 아닌지 몰라. 돈도 안 되는 무료봉사를 단순히 한 번 마주쳤다고 할래? 지금? 그러나 A 역시 성정이 여리다는 걸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티슈를 그녀 앞으로 밀어준 A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세상엔 자신이 도대체 무얼 원하는 건지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 많아요. 그게 잘못은 아니에요. 끔찍했던 과거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팍팍한 현실이 잊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알아챈 순간 고쳐야 해요. 알면서도 계속 끌고 가는 건 잘못이에요. 잘못된 방향으로 삶을 바꿀 테니까. 남편분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나가든 선택은 자유예요. 화끈하게 복수를 하든. 모른 척 덮어두든. 무얼 원하는지 깨닫게 되면 차근차근 시작해요"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이는 A가 어딘지 자신과 닮아 보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묘한 기시감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와 팍팍한 현실이 존재하는 삶일까. 지금 이런 궁금증을 품는다는 건 정말 답 없는 사람인 걸까. 누가 누구를 걱정해.


  결국, 그날 이후로 보름이 지났다. 화끈한 복수도, 결정적인 증거도 아무것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정신없이 빠져나왔다. 아주 작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여전히 시간은 목으로 흘러들어 가는 음료수처럼 꿀꺽꿀꺽 흘러들어 갔다. 그녀의 손에는 알로에 병이 들려져 있었다. 이제 정말로 끈적끈적한 계절이 바람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가뜩이나 더 잠 못 이룰 텐데. 이래서, 더워지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스스로 말을 걸어보았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니? 네 마음은 무엇이니.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로 물음표를 그렸다. 운동화 앞코로 물음표 끝점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직도 맘의 결정을 다 못했어요?"


  고개를 들자 A가 서 있었다. 어떻게 여기 서 있는 거지? 지금 또 금세 잠들었나? 요새 어쩐지 기운이 없어서 픽픽 쓰러지듯 잠에 빠지는 그녀였다. 또 빨래를 돌리다 소파 위에서 잠들었나.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A는 바로 옆 그네를 툭툭 치더니 앉아도 되죠?라고 묻곤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앉는다. 그리곤 조곤조곤 시작되는 이야기.


  "결정을 잘하지 못할 것 같을 땐, 죽어도 후회 안 할 자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요. 정말 지금 당장 곧 눈을 감는 순간이라면, 그때 가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는지. 뻔하긴 하지만 도움이 된다니까요? 마지막에 마지막 눈감는 순간 후회될 결정이라면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아요."


  그리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마치 더 이상은 자신을 속여 가며 흔들리지 말라는 듯이.


  "아, 이건 진짜 내가 웬만해선 단골손님 아니면 서비스 잘 안 하거든요? 진짜 특별 서비스다. 돈도 안 받는 의뢰 건인데 이렇게 내가 의뢰인 마음을 흔들려고 하지 않는데" 말꼬리를 늘리며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더니 A가 입을 뗐다.


  " 후회해요. 이렇게 책임지고 사는 . 친구들은 가끔 말하기도 해요. 지루한 학교 벗어나서 하고 싶은  하면서 사는  부럽다고. 그런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지루한 일상을 즐기고 싶어요. 매번 동생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싫고,  아이는 공부하는데 저는 등록금을 대주는 불합리함도 싫어요. 시대가 어느 시댄데 도대체 그래야만 하느냐고요. 그런데  미치겠는  말을  하는 거예요. 엄마가 불쌍해서, 아빠가 살아계실  바람으로 돌아가시고 나서는 빚으로. 그렇게 시달리는 엄마를 보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해요. 원하는  찾겠다고 책임 등지는  차마  해요. 그런데  감는 순간 생각해보면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은  후회될  같아요. 이런  하는  웃기죠? 그래요.  코가  자인데. 그래도 그쪽은 벗어나셨으면 좋겠어요. 누굴 대신해서도 아니고 본인을 위해서."


 저는 그렇게 못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제 이야기까지 다 꺼내놨는데 발 빼면 이거 진짜 나쁜 거라니까요? 짐짓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는 A를 바라보며 왜 동질감을 느꼈는지. 왜 과거가 궁금했는지 어렴풋이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종류의 슬픔을 겪은 사람들에게서는 비슷한 슬픔의 냄새라도 나는 걸까? 그건 A와 나만이 맡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구라도 알아챌 슬픔일까. 타인의 슬픔으로 자신의 슬픔을 치유하는 비겁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A의 슬픔을 공유한 오늘 어쩐지 용기가 생겼다고 말하면 비겁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어쩐지 그녀는 이 용기를 비겁함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공감이나 연대라고 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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