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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28. 2021

문을 닫고 떠나는 고통에게

끝을 예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알 수 없는 침입자처럼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는. 찬란한 아침햇살처럼 사방팔방으로 산란함을 흩뿌리며 전부를 뒤흔들고 마는 그것. 한 손에 쥐고 터트릴 듯 팽팽한 긴장감 속에 결국 온몸을 내던지며 너에게 항복하면 입이 찢어질 듯 짓이기며 나를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때로는 이른 새벽 아침이슬처럼 차디차게 다가왔다가 늦은 밤 까지 더운 숨을 내뱉으며 내 곁에서 살결을 가까이 붙이고 떨어질 생각 않는.

너의 고약한 악성을 막기 위한 방법은 너무 나도 손쉽지만 그 방법으론 넌 어림도 없다는 듯이 도망가겠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는 건 이렇게 무력해.

어떤 것은 새-하이얀 색. 어떤 것은 말랑말랑 젤리처럼 보이는 파아란-색. 어떤 것은 작고 동그란 원형의 것. 이것은 처방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중의 그것보다 조금 더 희소성이 있으니 너를 막기에 충분하다고 나는 믿지. 하지만 어쩌면 그 믿음 때문에 너를 제압할 수 있나 싶어. 결국 이름은 다 달라도 하나의 어머니에서 나온 것처럼 우린 배다른 형제.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너.

너만이 형질이 다른 그 어떤 것. 허락되지 않은 방문자. 사랑하지 않는 원수. 생각하면 서러워지고 두려워지는 지배자. 동시에 언제나 필요 없는 삶의 바깥. 표지의 작은 무늬조차도 너는 미치지 못하지. 나를 마음껏 가지고 놀 때는 네가 뭐라도 된 듯이 굴겠지만 사실은 인생에 작은 책갈피조차도 당도하지 못하지. 아주 오래전에 접었다가 다시 열어놓은 듯한. 이제는 자국마저 희미한.

고통마저 사랑한다는 유행가의 가사는 지랄. 고통을 사랑할 수 있는 건 언제나 끝을 알기 때문이지. 끝없는 고통이 집채만 한 해일처럼 너를 감쌀 때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영원히 어두운 밤에서 영면하지 못하고 영혼이 온 세상을 떠돌 때, 기꺼이 고통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까. 걸었던 새끼손가락을 찢어버리고 싶어 지겠지. 모든 건 끝이 있어야 행복해. 끝없는 삶은 형벌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우는 것이 무서울까.

눈에 보이는 존재와 싸우는 것이 무서울까.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것이 슬플까.

끝을 모르면서도 겁 없이 시작하고야 마는 것이 슬플까.

사실은 그 어떤 것도 고통 앞에서는 의미 없을까.

너는 새-까아만색. 어느 날은 새빠-알간색. 뒤를 돌면 샛-노오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영혼을 잡아먹고 내 육신을 발라먹고 남은 거죽을 저 멀리 전리품처럼 두 손에 들고 웃는.

사실 나는 알고 있지.

너를 마주치면 무섭거나 슬프거나 할리 없다는 걸.

네가 떠나고 나서야 비틀대는 손으로 이렇게 적어 내리겠지.

네가 너무 미웠다고.

그저 한 줄을 적어 놓고 얼굴을 묻어놓고 한참을 울겠지.

이제보니 그건 아픔이었고, 슬픔이었고, 두려움이었고, 고통이었고.

그래, 사랑해야 할지 말지는 다 지나고서야 알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끝이 오지 않은 거겠지.

언젠가 한 번쯤은 문을 두드리면서 말해줄래?


끝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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