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Nov 09. 2021

접속사가 되고 싶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잇는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 오직 ‘ 이후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김영하, '오직  사람' 작가의  중에서>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지금 실존해있는가. 본질을 넘어서서 이 자리에, 이 시간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왜 실존해야만 하는가. 아픔을 뛰어넘고 고통을 수반하는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실존해야 하는 이유. 무거운 빗방울이 제 몸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마다 마음도 같이 곤두박질친다. 이래서 비 오는 날은 무서운 법이다. 만개한 생각들은 나이만큼의 무게를 더하여 눈물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떨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외로운 일이다. 누군가는 지혜라 말하고 누군가는 여유라 말하겠지만 나는 외로움이라 말하겠다. 외롭다는 것은 홀로 서있는 것이다. 홀로 실존하는 것. 그것을 오랫동안 경계하여 왔으나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어간다. 더 이상 삶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안 된다. 모든 걸 다 아는 것 마냥 익숙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반찬투정을 할 수 없는 어른은 인생의 어느 한 부분도 편식할 수 없다. 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해야 하며, 온유해야 하며,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남들 앞에서 쉽사리 울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먹기 싫은 반찬을 먹어야 할 때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씹지 않고 얼른 삼켜버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슬플 때마다 감정을 곱씹지 않고 얼른 삼켜서 넘겨버린다.

그러나 때때로 삼킨 감정은 소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다시 구토를 유발하고 만다. 그럴 때 삶의 염증을 느낀다. 왜 이렇게 그지 같이 살까. 뭘 위해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까. 잘못 삼킨 알약 같은 매일들이 차곡차곡 위장을 건드려 신물이 올라오면 온통 세상은 어둡고, 야윈 등하나 두드려줄 너른 마음씨 하나 찾기가 그리 어렵다.

‘접속사가 되고 싶어’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나는 정말 비참해서 누구 앞에 나서기도 창피할 만큼 스스로가 볼품없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밤거리를 방황하며 마음은 늘 지옥이었고, 그 순간엔 미래도, 희망도,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선생님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은 아니라고 했다.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죽음만큼은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니 강렬하게 다가온다고. 비에 흠뻑 젖어 색깔이 진해진 아스팔트 바닥을 바라보며 탄탄대로만 걷기를 바란 건 아닌데, 걷다가 자꾸 멈춰서는 나를 너무 미워했다고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고백했다. 오랫동안 너를 짝사랑해 온 나의 마음에 대한 고백이었다. 너를 사랑했으나 영원히 이뤄지지 못할걸 안다고. 그래도 말은 건네 보고 싶었다고. 오늘따라 바닥에 눌려 사람들의 신발 자국이 가득한 껌 같은 것만 자꾸 눈에 가득 차서 용기를 내었다고. 사람들은 너를 희망, 행복 혹은 미래라고 부르겠지.

내가 나인채로 있어서 너무 슬프고 애달프다. 그런데 내가 나인채로 사랑받고 싶다. 그래서 접속사가 되고 싶다. 연결의 의미. 구멍 나고 해진 옷을 기워 입는 것처럼. 소실된 것들을 연결시켜 주고 싶다. 엄존하는 상처들이 지나가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찍어 놓은 마침표를 찍찍 긋고 감히 겁도 없이 접속사를 붙이고 싶다.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모든 게 엉망이라 더 이상 살기가 싫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죽기는 싫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기 위해 미친 척 춤을 춘다.

균열을 메우면 보기 싫은 실밥이나 흉터일 뿐이라고 섣불리 생각한 적도 분명 있었다.

솔직하게 지금도 몇몇 부분은 회의적이다.

이미 벌어진 틈 사이를 이어봤자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

그러나 때때로 튕겨져 나오는 회복 불가능한 일에 분개하고 길길이 날뛰면서도 다시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그 회복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째서 그런 마음은 지치지도 않고 기특하게도 탄력성을 유지할까. 다 늘어난 고무줄 마냥 늘어져 있어도 무어라 하지도 않을 깊고, 깊은 상처인데.

결국 도달한 결론은 나인채로 살아가고 싶어서겠지. 진정한 실존.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책상, 의자, 칠판, 교탁, 분필, 지우개, 필통, 학생 그리고 학교. 컴퓨터, 모니터, 서류, 파쇄기, 키보드, 달력, 탕비실 그리고 회사.

나를 설명하기 위한 많은 것들 중 하나에 회복 불가능한 일 역시 포함되니까. 어떤 사건을 마주하든 결국 그건 나니까. 애써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들을 접속사처럼 안고 간다.

어제까지는 실연에 질질 짰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다시 사랑해 보려고 해.

너무 운동을 열심히 했어.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뛸 때 숨이 차지 않지.

멋진 반전을 사용하는 접속사를 마구 넣고 싶지만. 사실 대부분은 그냥 안고 갈 뿐이다. 이렇게.

나는 아직도 지난 상처가 무서워.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있지. 언제 나아질지 모를 것 같기도, 다 온 것 같기도 해. '그리고' 오늘도 잠들기 전 약을 챙겨 먹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아주 작은 결합을 도모하며, 끊길  이어가는 그리고 견뎌내는 접속사처럼 살아갈 테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문을 닫고 떠나는 고통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