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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Feb 25. 2022

답장이 없을 편지에 추신을 붙여서

어쩌면 슬프지 않은 이별

최근에 오랜만에 손 편지를 썼다. 친한 사이에 편지를 자주 주고받기 때문에 손 편지는 사실 별일이 아니다. 기념일이 아니어도 별말 없이 빼곡하게 빈 종이를 채워나갈 정도로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니까. 다만, 이번 편지는 받는 사람이 특별해서 조금 별일이었다. 가까운 사이도 먼 사이도 아닌, 완벽히 타인이지만 가장 내 비밀을 많이 아는 사람. 불가능해 보이는 관계지만 당당히 실재하고 있는 그런 사이. 나의 일상 속 수많은 불가능을 지워준 사람. 나의 정신과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표면적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선생님은 나에게 한 통의 편지만을 받았으니까) 끝끝내 전하지 못한 편지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세 번째 편지가 될 것이다. 몇 번의 할 말을 속으로 삼키고서야 나는 겨우 한 통을 건넬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나도 진심이라면 차마 밖으로 꺼낼 수 없음을 정말 오랜 세월 겪어왔다. 늘 이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한계점에 도달해야만 겨우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진중함으로 누군가는 미련함으로 불렀다.

그렇기에 선생님이 아마 병원을 그만두신다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면 끝끝내 전하지 못한 편지 네 번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저번 상담 때 선생님은 갑작스럽게 병원을 떠나게 되었다며 소식을 전달했다. 말 그대로 ‘전달’에 가까웠다. 담백하고 침착한 태도였다. 그 소식에 감정을 싣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긴 했다. 의사는 환자의 삶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행동을 교정하고, 올바른 처방을 할 의무는 있지만 환자의 삶에 관여해서는 안 되니까. 그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늘 경계했다. 의지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자. 나는 환자고 선생님은 치료의 한 과정이니 해주시는 말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수 없이 다짐했다. 그래서 때로는 선생님의 치료의 말도 부러 쓰게 바꿔서 해석한 바 있으며 그 결과 내 맘이 괴롭더라도 그 편이 더 이롭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생님조차 온전한 내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기. 애초에 편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말자. 내 마음의 과육이 있다면 더 물러지기 전에, 어쩌면 물러터지기 직전일지도 모르니까 그만하자. 뭘 그만하냐고? 누군가를 믿는 것을 그만하자. 언제나 나를 위해 응원의 말을 해준다는 것. 언제나 옆에 있어줄 거라는 것. 나름의 방어기제 일지도 모른다. 이제껏 써온 방식은 한 번도 오류를 낸 적이 없었다. 아니면 오류를 확인하려 한 적이 없었던가?

내 방식은 하나였으니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상상하고 연습했다. 언젠가 선생님이 옆에 없을 때의 모습을. 그때 홀로 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갑자기 물밀 듯 불안이 밀려왔다. 시간이 조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 당장 혼자서야 하면 어쩌지. 멋대로 새운 가설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라고 한편에선 멈추면 그만이라고 외치기도 했으나, 꽤나 자주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괴로운 감정도 연습하면 익숙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를 사지로 모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까만 밤에 겁먹은 얼굴을 한 채로 더 까맣게 덧칠을 하는 존재가 나란 걸 너무 잘 알아서, 아는데도 어쩌지 못해서 오도 가도 못하는 밤은 늘어만 갔다.

그래서 이렇게 담백한 걸까? 그만두고 한동안은 쉬다가 추후에 병원을 차려볼 참이라고 했다. 다음 선생님께 세밀하게 인수인계를 하시겠다는 선생님의 말이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귀에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소금 간을 전혀 하지 않은 오동통한 흰 살 생선의 맛처럼 어떠한 자극도 없었다. 어떠한 악의도 어떠한 결과도 초래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일단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선생님이 ‘뭐 따로 하실 말씀이나 질문 없으세요?’라고 말을 건넸을 때 그제 서야 목울대가 꽉 막혀서 할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조금 놀라서 지금 아무 생각이 안 나요’라고 대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숱한 연습으로도 감정은 절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오류는 사소한 계기로 발견하고야 만다.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쩐지 너무 슬펐다. 갑자기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는 선생님이 밉지는 않았다. 다만,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홀로 서있기 위해 떠나는 상상을 하며 노력도 해봤는데 이렇게 기분이 처참하게 무너진다고? 내가 너무 많은 곁을 내주고 만 건가? 늘 그것을 경계해왔는데 어디서부터 일어난 누수가 감정의 물결을 함부로 범람하게 만든 건가. 부실공사의 원인을 찾아야 해.

밤이 되자 편두통이 밀려왔다. 아마도 장례식장을 나서서 납골당으로 향하는 차였을 것이다. 그때의 풍경도 같이 밀려왔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봉인하고 나오면서 어디선가 본 문장을 떠올렸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울게 만든다.’

머리에서 마치 갓 잡은 생선이 뛰는 것처럼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익숙할 듯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을 감싸면서 생각했다. 원인을 찾는 것쯤은 그만하고 언젠가 아플 줄 예상했으니 정말 담백하게 이별하자고. 갓지어낸 쌀밥 위에 갓 구워낸 흰 살 생선을 발라주던 엄마처럼 정갈하게.

최근 예능프로에 출연한 뇌 과학자는 인간이 애초에 본인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는 없게 설계되어있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나 뇌의 착각으로 인해서 남을 아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는 결국 남에게서 보고 싶은 ‘나’의 모습을 보거나 투영시키는 것이라고. 편지에 쓴 내용은 선생님을 향한 것이지만, 대부분 나의 다짐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들. 사실 편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쓰는 행위도 있지만 받는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 답장이 참 좋다. 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다. 하지만 애초에 이 편지는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였다. 떠나는 선생님께 고하는 일종의 고백 같은 것. 작별인사. 회신을 독촉할 수 없는 관계.

그래도 생각보다 슬프지 않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나에게 쓰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다정함마저 곡해해서 마음의 거리감을 두려 노력하는 내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잘 헤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 이제껏 해보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최대한 사실만을 옮겨 적겠다 다짐하며 써 내려갔다. 그러자 그동안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확실한데,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분명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은 달라진 게 없어 보여도 시간이 또 지나면 달라져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아마 내 맘에 피어오른 의문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환자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의 직업이니까.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이 얼마나 행운인지 정신과를 다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이 의외로 까다로운 지점에 놓여있다는 것. 그래서 말미에 추신처럼 한 줄을 적었다. 당연해 보이지만 엄청난 행운을 제게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어디서든 무엇을 하시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편지의 백미는 추신이라고 생각한다. 한 덩어리의 글을 다 끝내고 굳이 덧붙여서 무언가를 더 써내려는 것이니까. 주제와 상관이 없어도 가능하다. 일정의 흐름을 갖고 막 내달리다가 잠시 샛길로 빠져도 용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빼버려도 좋을 만큼 쓸데없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덧붙임의 말에 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는 진심을 툭 던져놓고 도망가듯이.

그리고 그 추신이야 말로 상대에게 던지지만 결국 ‘나’의 바람이 포함된 한마디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선생님이 어디서든 행복하실 때 나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선생님께 들은 이후로 내내 주문처럼 외우는 말이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좋아질 거예요.' 눈을 올곧게 바라보며 단단하게 건네는 그 말이 그 순간 주술과도 같았다.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고, 거짓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는 강력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문처럼 중얼거리곤 할 일을 다시 해냈다. 괄호로 숨겨져 있지만 나의 추신은 이러한 것이다. 어디서든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저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게요)


그리고 지난주 마지막 상담 때 편지를 드렸다. 예상치 못한 눈물이 한 방울 나와서 당황했다. 선생님은 아마 많이 당황도 했고, 미울 수도 있고, 서운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갑작스럽게 전달하게 돼서 미안했다고. 오랜 시간 봤는데, 너무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서 본인이 도움이 더 못 드린 게 송구스럽다고 생각한다고. 그런데,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어릴 때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종업식을 할 때마다 같은 반끼리 헤어지기 싫어서 서운하지만 결국 새 학년에서 잘 적응하고 재미를 찾아가지 않았냐며. 새로운 선생님과 처음부터 맘을 열기 어렵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히려 새로운 선생님이 더 몰랐던 부분을 잘 알아채 줄 수도 있고 적응은 한순간에 찾아올 수도 있다고. 그냥 그런 거라고.

딱 선생님다운 위로가 좋았다. 마지막까지 담백하게. 그토록 원하던 정갈한 이별이었다. 타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온갖 상처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인데도 이렇게 가볍게 이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답장이 없어도 참으로 좋았다. 병원을 나서며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병원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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