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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Mar 29. 2022

봄날의 시작을 믿으실까요?

방탄소년단 <봄날>이 말하는 희망의 시작


나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몇 개 있다. 잘 때 가끔 한쪽 팔을 위로 들고 잠을 잔다든지(동생이 처음 말해줬을 땐, 믿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에 팔이 아파 일어나 보니 한쪽 팔이 진짜 들려져 있었다!) 청결에 유난을 떠는 편이 아니면서도, 손에 냄새가 배이는 건 특별히 싫어해서 자주 손 냄새를 맡거나 하는 것. 이런 것들은 꽤나 기이해서 역시 나만 그렇겠지? 하는 마음이 든다면, 이 습관은 기이하다기보다는 다수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계절과 반대되는 노래 듣기. 이상하게 여름에는 한 겨울 노래가 미치게 듣고 싶어 지고,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에는 한 여름 노래가 듣고 싶어 진다. 그리하여 지난여름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뜬금없이 인피니트의 <하얀 고백>이 들어있었다. 땀에 절여진 옷을 입고서 입으로는 '못 전해진 고백을, 하얀 눈과 함께 찾아가서'라고 흥얼거렸다. 그리고 겨울이 성큼 찾아와 눈이 내리던 출근길에는 시린 손을 집어넣으며 동방신기의 <Hi Ya Ya 여름날>을 들었다. '댄싱인 섬머 파라다이스 사랑해 하이 야야야. 여름날 우리 추억을 평생 간직해.' 계절감을 상실해도 한참 상실한 가사들의 향연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다음 계절이 찾아올 준비를 미리 시작하는 것. 즉, 자연의 섭리를 자연스레 생득 하여 나타나는 본능적 행동으로도 바라볼 수 있겠다. 언제나 끝은 곧 시작이니까.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하여 수많은 지인들에게 언급한 적 있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겨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지인들은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름이 시작될 때부터 다시 겨울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지금도 봄을 기다리면서도 겨울이 끝나는 것을 너무나도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연말 겨울을 좋아하는 명확한 이유를 찾게 된 사건이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한창 퇴근 후 유튜브로 캐럴을 듣는 것에 푹 빠져있었는데, 인상적인 댓글이 있었다. '우리들이 겨울을 사랑하고 설레는 이유는 유일하게 끝과 시작이 모두 함께하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참 많다. 우선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 편이라, 추운 바람이 부는 것도 좋아하고, 코트를 맘껏 입을 수 있는 것도, 맛있는 귤을 잔뜩 먹고, 붕어빵이나 호떡을 위해 현금을 들고 다니는 일도 즐겁다. 그러나 아무래도 끝과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리도 좋았던 것이 아닐까. 찬 바람과 함께 색채를 빼앗겨 온통 무채색으로 뒤덮이면 영화관 스크린이 꺼지듯 마지막 장면을 준비하며 아쉬워하지만, 다시 화면이 밝아지며 다음 영화를 상영하듯 새봄을 맞이하는 순간이 교차하는 계절.


함민복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리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로 끝맺음한다. 경계와 균열은 마주치기만 해도 막다른 골목과 같아 막막해지지만, 언제나 마음은 그쪽으로 흐른다. 무언가 애틋하고 마음이 쓰인다. 모든 경계 앞에서 망설이는 삶을 살아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겨울은 이러한 경계에 놓인 계절이다. 지독하리만큼 고립되어 차갑지만 틈 사이사이 피어난 꽃을 발견하는. 그리고 그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반드시 끝이 난다고 믿는 것이다. 겨울의 끝에는 늘 봄이 기다리는 것처럼.


이러한 경계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노래. 방탄소년단의 <봄날>을 통해서 사랑해 마지않는 겨울의 의미를 좀 더 나눠보고자 한다. 봄날은 제목부터 모순이다. 제목에 대놓고 봄날을 말하지만, 가사 내내 시린 겨울을 연상케 하는 내용만 가득하다. 제목에 계절이 들어가는 노래는 참 많다. 특히나 봄을 그리는 노래는 더욱 많다. 봄은 보통 희망이자 설렘의 계절이니까. <봄날>도 제목만 보면 얼핏 설렘을 노래하는 달달한 노래일 것만 같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 싶다. 너희 사진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라는 가사로 노래가 시작된다.

 '허공을 떠도는 작은 먼지처럼 날리는 눈이 나라면 조금 더 빨리 네게 닿을 수 있을 텐데.'

'얼마나 기다려야 또 몇 밤을 더 새워야 널 보게 될까 만나게 될까.'

화자는 떠나간 이에 대하여 사무치는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별 이야기는 노래 가사의 단골 소재이다. 기쁨이 만들어내는 감정보다 아픔에 귀 기울이기가 더 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어쩐지 슬픔은 꼭 희석시키고 싶어 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슬픔에 술을 섞든, 눈물을 섞든, 유희를 섞든 감정의 농도를 옅게 만드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데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는 것이 의외로 잘 섞여들 때가 많다.


이러한 이별 이야기는 대체로 네가 너무 그리워서 널 영원히 못 잊을 거야. 혹은 네가 너무 그리운데 이젠 아무렇지 않아 혼자서도 잘 살 거야. 혹은 네가 너무 그리우니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대체로 이별은 찌질하니까 노래도 구질구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나만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절절한 이별노래를 듣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봄날>은 어딘가 산뜻하다. 분명 시린 계절 한가운데에서 외로움을 말하는 것 같은데 묘하게 희망을 읽어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모든 경계를 무마시키는 힘. 바로 믿음이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반드시 봄날이 올 것을 믿고 있다. 앞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배경은 새하얀 설원이 떠오르는 계절인데 왜 봄날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화자의 믿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화자는 '어떤 어둠도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추운 겨울 끝은 지나 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 꽃피울 때까지 그곳에 좀 더 머물러줘.'라고도 말한다. 화자에게 봄날은 믿음이자 희망의 상징이며, 꼭 이뤄낼 의지와도 같다. 더 나아가 증명할 필요 따위는 없는 진리에 가깝다. 그렇기에 추운 배경은 화자에게 현재이지만 곧 과거가 될 일이고, 봄날은 화자가 꿈꾸는 반드시 다가올 미래가 된다.


춥고 시린 겨울이 널 생각하는 외로움의 마음. 즉, 아픔과 고난이라면 꽃이 피는 봄날은 다시 찾아올 희망, 극복하는 마음, 치유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듯 어떠한 아픔도 반드시 치유로 바뀔 수 있다는 해석이 된다. 모든 끝과 시작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말이라 큰 감흥을 부르는 문장은 아니다. 계절은 항상 다음 계절을 부르고,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에 도달하고, 모든 만남은 이별을 동반한다.


이와 비슷한 불교의 윤회사상은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굴러가듯 인간의 일생은 원처럼 돌고 돈다는 뜻이다. 죽음과 생은 연결되어 있고, 나 자신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에 지난 생의 업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윤회사상이 맞다 아니 다를 논쟁하기 위해 이야기를 던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윤회사상을 믿고 누군가는 믿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희망을 믿거나 폐기한다.


<봄날> 가사 중 '여긴 온통 겨울뿐이야 8월에도 겨울이 와. 마음은 시간을 달려가네 홀로 남은 설국열차.'

만약 우리가 화자의 공간처럼 한 여름에도 눈이 와서 일 년 내내 겨울을 마주하는 설국열차에 탑승했다면? 과연 긴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는 걸 알아도 믿을 수 있을까?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욱 그렇다. 내가 알아, 언젠가 그거 다 별거 아닌 일이 되더라 그러니까 날 믿어봐.라고 쉽게 건넸던 말들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웠는지를 실감한다.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겐 놀라운 사실. 믿으니까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만큼 자신의 세계를 알 수 있다. 낮은 시선으로 내려가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 걸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세계의 섭리를 안다. 어떤 불편함이 하루를 좌절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막막한지. 그리고 알게 되면 비로소 바꿀 수 있다. 반대로 끝까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알 필요가 없다. 소수의 의견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얼마나 절박했는지. 알 필요가 없는 세상은 그렇게 알 수도 없는 세상으로 잊혀간다.


그렇기에 믿음이 중요하다. 노래의 화자는 봄은 반드시 온다는 걸 아는 게 아니라, 간절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죽음 뒤에 다음 생으로 회귀한다는 어느 사상처럼. 막막한 시련은 희망으로 회귀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눈보라가 휘날려서 이 세상 마지막 겨울을 맞이하는 것 같아도 '니 손 잡고 지구 반대편까지 가 겨울을 끝내고 파'라고 말할 만큼 봄이 찾아온다는 믿음을 폐기하지 않는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서 폐기하지 않는 희망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알 게되면 우리는 변화한다. 눈이 녹는 방향으로.


이 곡이 수록된 앨범명은 'You never walk alone'이다. 온통 얼어버린 하얀 설원 위에서 꽃은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 같아서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리를 구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옆에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면 어떨까.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외로운 사람들이 외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 혼자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망을 믿는 이야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겨울에도 봄날을 기다리는 이 노래처럼. 꽃이 피어나고 봄이 올 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노래의 마지막처럼, 그곳에 좀 더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더 많은 봄날을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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