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응원이 있을까.
# 1. 사사로운 프롤로그
30년 루틴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퇴사를 했다. 맘껏 책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제일 컸다.
(엉뚱하긴 하다. 퇴사하면서 책이라니...) 하지만 나름 계기가 있다. 철학자이면서 시인, 수필가인 데이비드 소로(1817~1862,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의 제자)는 독서를 통해 경험한 '생각의 힘'이 자라는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날에 나는 밤사이에 옥수수처럼 자랐다. 정말이지 이런 시간들은 손으로 하는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공제되는 시간들이 아니고 오히려 나에게 할당된 생명의 시간을 초월해서 주어진 특별수당과도 같은 것이었다" 생각의 높이가 옥수수처럼 쑥쑥 자라는 순간. 과연 그건 어떤 순간일까. 이것을 나는 경험 해 보고 싶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오지 않는 순간.
#2. 여기서부터가 진짜 이야기_경비아저씨의 특별한 선물
회사에 마지막 주차를 하고 있을 때, 경비아저씨가 달려오셨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나를 위해 책 몇 권을 선물하고 싶다면서 노란 종이가방을 주셨다. 갑자기 날아드는 번개처럼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종이가방 안에는 무려 6권의 책이 담겨있었다.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의 이야기 '살롱 드 경성', 칸트 전집 중에 1784~1794에 발표한 저술 10편을 모아놓은 '비 만기 저작 1', 나이 듦, 늙음에 대한 성찰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샤이닝'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일을 하며 작품과의 은밀하고 심오한 대화의 경험을 글로 쓴 패트릭 브릴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존재였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일 수 있는 가족에 대한 조명 류현재의 '가장 질긴 족새,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읽으려고 사놓은 나의 선택과 완전히 다른 류의 책들. 가족과 철학, 예술, 나이 듦... 인생에 중요한 키워드들이 모두 담겨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새롭게 사색해야 할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3. 꾹꾹 눌러쓴 응원
노란 종이가방 안에는 책만 있는 게 아니었다. 꾹꾹 눌러쓴 두장의 편지가 함께 들어있다. 나에 대한 응원과 책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들. 세상에나.. 읽지 않았으면 선택하지도 추천하지도 못하는 게 책이다. 경비아저씨는 이 책들을 모두 다 읽으신 것이다. 책을 통한 응원, 이토록 내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응원이 또 있을까.
이렇게 깊은 마음 나눔은 언제 시작됐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와 경비아저씨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팀장일 때, 경비직 채용이 있었다. 나는 면접관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에 아주 많은 생각이 혼재되어 있는 듯 약간은 정돈되지 않은 본인의 살아온 경험에 대한 이야기,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지 나름의 각오를 펼치는 이야기... 많은 말들을 나눴지만, 중요한 것은 이분의 눈빛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오신 인생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선한 눈빛. 그게 첫 인연이었다.
그 후 경비아저씨는 회사 곳곳을 누볐다. 방문객이 많은 날이면 지하주차장으로 지상주차장으로 주차 관리를 위해 열심히 뛰셨다. 출장 갔다 왔을 때 직원들 주차자리가 없으면 본인 차를 빼고 주차하게 배려해 주셨다. 정말이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시는 인생 선배의 모습이었다.
그런 일생생활 속에서 딱 한번 스치듯 책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경비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있고(나도 실컷 책 읽고 생각이 자라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본인의 살아온 인생 등등을 내가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고- 이 말은 나에게 또 다른 응원이 되었다. 아, 정말 나의 글을 써나가야겠구나, 그러다 보면 진짜 이분의 인생도 써지지 않을까. 아직은 너무도 부족하지만...
#4. 맨 먼저 집어든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여섯 권의 책 중에 제일 먼저 손이 간 책은 (책 선물하신 분이 경비아저씨여서일까)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이 책의 작가 패트릭 브린리는 미국 잡지 [뉴요커]에서 4년간 커리어를 쌓다가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친형이 암투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고 잘 나가는 직장생활을 마무리한다. 글쓰기의 의미를 잃고 사색과 방황의 시간을 가진 브린리는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방문했었던 메트로폴리판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취직을 한다.
관람객이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 거장의 작품들과 때론 심오한, 때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미술관 책이지만 그림을 실은 사진은 없다. 오로지 그만의 감성으로 때론 매우 창의적으로 미술 작품들을 독자의 가슴에 닿게 한다.
초반 부분만 읽었지만 매우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다. 거장의 작품들을 전시한 전시관의 거장의 마을이라고 하고,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9,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를 모두 세어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을의 가장 나이가 많은 주민은 성모와 예수라고 했다. 가장 오랜 역사인물이리라. 가장 젊은 주민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1820년에 그린 초상화 속 인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시관 B구역에는 210명의 예술가 산단다... 예수가 등장하는 그림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을 집어 들면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아무도 없는 미술관에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 있는 브린리는 만나는 순간도 설레고, 브린리가 소개하는(정말 일반적인 작품소개가 아니다) 작품들과 만나는 순간도 설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의 생각의 높이가 조금은 자라고 있겠지
#5. 응원에 대한 응답
선물 주신 책을 다 읽지도 않고 지금 글을 쓰는 이유는, 경비아저씨의 응원에 나름의 응답을 하고 싶어서다.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응원을 주신만큼, 제가 하고 싶었던 책 읽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실천해 나가 볼게요. 그리고, 책 속의 지혜들 놓치지 않고 글로 써보겠습니다. 그렇게 써 보다 보면, 나의 생각의 높이가 옥수수처럼 쑥쑥 자라서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쓸 만한 솜씨가 되지 않을까요.
저에게 당신은 1호 독자입니다. 1호 독자를 확보한 작가. 행복한 여정을 이제 시작해 보겠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