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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yj Oct 02. 2023

기억

약에 취해서 억지로 눈을 떴다. 사방이 흰 벽인 걸 보내 정신과 폐쇄 병동인 것 같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젠장, 아직 안 죽었나? 순간,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유니폼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내가 근무하던 병원이 아닌가? 

“영감님,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네?”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벌써 영감으로 불릴 나이인가? 이제 30인데? 

“영감님, 오전에 여사님들이 머리 감겨 주실 거예요. 그리고 나면 저랑 같이 산책가요. 그전에 약 먼저 드릴게요.” 간호사는 능숙하게 침대를 세우더니 강제로 입을 벌려 약을 쑤셔 넣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저기, 선생님.” 나는 간호사를 불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선생님.” 나는 다시 불렀다. 하지만 간호사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가버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왜 갑자기 영감님이 되었고 저 간호사는 왜 내 말에 대꾸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지? 하지만 고민도 잠시, 약 기운이 돌면서 다시 잠이 쏟아졌다.      

얼마나 잤을까? 물소리가 시끄러워 잠이 깼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르는 중년 여자 두 명이 나를 씻기고 있었다.  

“누구세요?” 나는 물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대꾸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영감님. 오늘은 인물이 더 좋으시네요.” 여사라는 사람 한 명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그 옆에 또 다른 여사라는 사람도 소리 내 웃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소름 끼치도록 수치스러웠다. 

“영감님, 거의 끝났어요. 옷 입고 거울 보여드릴게요.”

두 명은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옷을 입히더니 침대를 세워 거울을 보여주었다. 

“어때요? 영감님, 오늘은 더 잘생겨 보이시죠?” 거울을 보는 순간, 그녀들의 비웃음과 함께 나는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곳은 흰 벽이 있던 그 방이었다. 거울 속의 나는 분명히 노인의 모습이었고 목에 무언가를 꽂고 있었으며 코에도 줄이 달려 있었다. 나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전형적인 노인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서아를 죽이려던 밤부터 지금까지 의식을 잃은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 머리에 무언가 부딪혀 쓰러졌는데 갑자기 노인이 되었다고? 그것도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쓸모없는 노인으로? 분명히 그날 잠시 의식을 차린 기억도 있는데... 여기는 내가 일하던 병원이 아닌가?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느끼는 공포스러운 두통도 밀려왔다.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아침에 본 간호사가 나타났다. 

“영감님, 머리 감고 나니까 훨씬 더 멋지세요.” 간호사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예전의 원무과 직원이랑 닮아 있었다.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목에 꽂혀 있는 튜브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또다시 내 입을 벌려 강제로 무언가를 집어넣어 삼키게 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잘 지냈어?” 누군가 말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너였다. 내 친구이자 나의 환영이던 너. 나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무리하지 마. 네가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는 전혀 늙지 않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네가 그날 서아를 보내지 못해서 긴 시간 나는 또 이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어.”

나는 너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시간이 부족해. 너를 선택한 것도, 시간을 버는 것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거든.”

너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네가 그리웠어. 내가 떠나던 날을 기억해? 난 너의 친구이자 가족이고 너 자체였는데. 너를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둔다는 것은 내게도 고통이었어.” 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마치 어제 헤어지고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아무런 거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넌 오랫동안 잠을 잔 것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넌 잠들지 않았어. 네가 망쳐버린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거야. 너의 시간은 지워진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는 표정 없이 차갑고 다정한 손으로 내 목을 어루만졌다.

“그러지 마. 네 마음을 다 이해해.”

‘무엇을 이해한다는 거야?’ 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네가 말을 하지 않아도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참, 너는 내 이름은 기억해?”

그러고 보니 나는 너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너는 환영이 아니었어?’ 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래. 나는 환영이 아니야.” 너는 내 말이 들리는 듯 대답했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오랜 기간 너와 함께 있었어. 네가 살아가는 내내 함께였지. 네가 수십 번 다시 태어나도 늘 네 곁에 있을 운명이야.” 너는 웃었다. 

“지옥에는 사람들의 고통을 먹고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자라는 새타니가 있어. 그거 알아? 아이를 죽인 자가 목이 잘린 동물을 태워 자기가 죽인 아이와 같이 제를 지내면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세상을 멸할 마지막 새타니가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살인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새타니에게 길을 열어주는 사신이 된다는 것을 말이야.”

'너는 도대체 무엇이야? 지옥에서 온 악마인 거야?' 나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 나는 지옥에서 왔어. 지옥의 새타니는 자라려면 많은 인간의 고통이 필요해. 그래서 지옥에서 사는 거야. 지옥의 고통을 먹으려고. 하지만 지옥의 고통보다 살아있는 인간의 고통이 나를 더 빨리 성장시켜. 사실 나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거든."

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온몸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정말로 타고 있었다. 내 몸 전체가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온몸의 모든 세포를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불 속에 손을 넣어 내 얼굴을 만졌다. 

“선아. 너는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네가 사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늘 나를 조마조마하게 했어. 기억나? 송연이 떠나던 날도 지금처럼 불길 속에 있었지. 나는 어른이 되는 날을 오랜 시간 기다려왔어. 하지만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은 너 때문이야.”

나는 온몸이 타는 고통 속에서도 너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너는 이마에서부터 붉은 피를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고 이내 온몸에서 피로 뒤덮였다.

“선아. 기억해야 해. 지금의 내 모습을. 나는 피를 흘리던 새타니로 태어났어. 네 어미의 욕심과 네 아비의 비겁함, 그리고 네 작은 어미의 한이 만들어낸 업보이지. 너는 수 십 번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고통받은 인간으로밖에 살 수 없어. 하지만 이제 끝나가. 너도 나랑 같이 가자. 우리가 약속했던 그 세상으로.”

너는 내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했다.

“선아. 이제 마지막이다."

너는 좀 더 힘을 줘서 목을 눌렀지만 희한하게 조금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평온함도 느껴졌다. 너는 불길 속에 고개를 넣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나의 친구야. 우리의 다음이 없기를 기도할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육체의 고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졌다던 기억 속에 선명한 얼굴이 떠올랐다. '송연' 그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선. 나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왔어. 나는 수백 년을 걸쳐 인간의 고통과 재앙을 먹으며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 나는 고통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인내를 배울 수 있다고 믿어. 근데 선아. 그거 알아? 무수히 많은 죄를 지어 지옥 불에 던져도 사람들도 싸우고 투기하고 서로를 죽이려 해. 이미 죽은 몸들도 그렇게 어리석은 싸움과 미련한 투쟁을 계속하는데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서로 죽이고 살리며 끝없이 순환하는 곳. 그건 지옥일까, 아니면 천국일까?”

나는 내 몸이 모두 불타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몸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한데 의식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네가 그 마지막 새타니구나.' 나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세상을 불태울 마지막 새타니야. 너랑 함께 자랐던 새타니. 피 흘리던 아이. 그게 바로 나야. “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이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송연이. 그 아이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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