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인생 반환점을 돌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마흔 초반. 열심히 살지 않았던 때가 있나 싶을 만큼 무언가로 항상 바빴다. 학생의 본분을 다 해야 하는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졸업 이후에도 쭈욱 그랬다. 회사 일, 자기 계발, 독서, 외국어, 연애로 이어지는 정신없는 스토리는 출산으로 피크를 찍었다. 아이를 낳은 뒤 시작된 찐한 K워킹맘의 삶. 뭐 그리 엄청나고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직장인 등등 주어진 다양한 역할.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못된 성격은 늘 스스로를 다그쳤다.
회사에서는 인정받으며 전문성도 쌓고 싶고, 건강은 중요하니 운동도 해야 하고, 노후를 대비하려면 재테크도 해야 하고,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은 교육이라던데. 나름의 소신(이라 읽고 자유방임으로 해석되는)으로 학원은 보내지 않았지만 왠지 신경을 써야 할 거 같고, 그 와중에 책도 읽어야겠고, 애들이 크면 가족 여행은 언감생심이라니 어릴 때 부지런히 다녀야 하고. 나름 하이퍼 텐션에 극강 체력, 웬만한 일은 몸빵으로 때우겠다는 의지까지 충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몸은 하나이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몸을 나누든 시간을 늘리는 것 외에는 별 수가 없었다. 종종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서 후~ 불면 또 다른 내가 나타나는 분신술을 상상했다. (갑자기 항암 치료로 머털도사로 빙의했던 웃픈 기억이 떠오른다.) 한 명은 회사로, 한 명은 집안일을, 한 명은 아이를 챙기고, 한 명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이지만 부질없는 망상으로 헤벌쭉하며 현실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기. 이때부터 무한 타임루프 영화를 좋아하는 기질이 생겼던 걸까.
항상 1인 다역으로 동동거리는 나와 달리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1인분도 (물론 본인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버거워하는 남편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이 부분은 한 챕터를 할애해도 모자라기에 일단은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함)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욕심의 정점에 찾은 나름의 현명한(?) 해결책은 잠을 줄이는 거였다. 적게 잘수록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고3 수험생 같은 수면 패턴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암환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더니. 여전히 단어만으로도 무거울 수밖에 없는 중증, 암은 생각지 못한 특권을 주었다. 그간 어깨와 등에 꼭 매고, 절대 내 품에서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역할들에서 느슨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많은 일들은 오랫동안 느껴왔던 책임감이 무색하게 그럭저럭 굴러갔다. 누구도 그 상황에 대해서 뭐라 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암이 아니었다면 으레, 원래부터 내 몫이라고 생각했을 많은 일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무책임하고 살갑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까 두려웠던 마음은 나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항상 나보다 주변을 살피고 베풀던 입장에서 도리어 챙김을 받게 되었다. 의무감에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일조차 감히 암 앞에서는 존재감이 무색했다. 무게감과 시급함은 한없이 쪼그라들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롯이 '살고 싶다'는 순수한 본능. 명확한 우선순위. 핵심가치가 확고해지니 To do list를 가득 채웠던 많은 것들이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것들도 예전만큼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내심 나만 생각하면 되는 상황이 미안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더니, 익숙해지니 슬슬 꾀가 난다. 특권을 십분 활용해서 은근슬쩍 티 나지 않게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미루고, 심지어 모르는 척도 해본다. 항상 꽉 움켜쥔 삶이었던지라 조금은 어색하지만 살살 놓는 연습도 해본다. 조금 느슨해진 삶의 여백이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픈 거야 어차피 기정사실이고, 그에 따라오는 부산물 치고는 꽤 훌륭하다 '암환자가 되니 주변 이들이 모두 친절을 베푼다' (사노 오코, <죽는 게 뭐라고>) 는 멘트에 도취되어 특권을 열심히 활용하는 비겁함도 체득했다.
힘들어도 시간은 갔고, 표준 치료는 끝났다. 여전히 항호르몬 치료 중이고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과 잦은 병원 방문, 보너스로 복직까지. 나름 꽤 버겁지만 그건 나의 몫이다. 이제 괜찮냐고 묻는 이들에게 구구절절 사연을 이야기하기 민망하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넘긴다. 대체로 사람들은 표준치료를 마치면, 암환자로서의 시간도 끝났다고 생각한다. 자라지 않은 머리카락을 빼고는 다시 돌아온 듯한. 진짜로 그렇다면 참 좋을 텐데. 암진단처럼 종료도 명확한 경계선이 있다면, '고생 많았고, 이제 끝났으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거야!'라고.
아직 몸도 마음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지만, 소소하게 누리던 특권은 유효기간이 지난 듯 슬그머니 사라졌다. 주위의 인식과 기대치는 다시 이전의 나를 향하는 듯했다. 수많은 역할과 해야 하는 일들에서 영원히 해방된 게 아니라 잠시 유예된 것처럼. Stop이 아니라 Hold였던 걸까.
나의 품을 벗어난 줄 알았던 많은 일들은 잠시 주인을 떠났다가 다시 제 자리를 잦은냥,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어깨와 등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소소한 일상과 범사에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도 했는데. 다만 잠시 유예되었던 현실의 많은 일들이 치료를 마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갑작스레 몰려드니 혼란스럽고 버거웠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더라도, 일상은 항상 행복하고 좋기만 하진 않으니까, 원래 삶은 그런 거니까.
삶은 일체개고, 워킹맘의 고된 시간 속에 되뇌었던 문구가 떠오른다. '마치 젖은 솜뭉치를 한가득 등에 짊어지고 남은 평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던 젊은 암경험자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던 의료진의 인터뷰. 여전히 암치료와 경험은 개인과 가족처럼 적은 울타리 안의 일로 여겨지기에, 암경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남들처럼 삶을 이어가야 한다. 취직, 결혼, 출산, 경제활동 등 마디마디 보이지 않는 힘겨운 산들을 넘으면서.
겉으로는 멀쩡해도 체력적으로 힘든데, 점점 예전처럼 왕성한 에너지로 살던 때를 기대하는 듯한 주변 사람들. 베베 꼬인 마음은 머리로는 아닌 걸 알면서도 '치료 때 그만큼 해줬으니 이제 엄살 좀 그만하지'라고 느껴져 괜히 서운하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남편은 책이 나오고 세상에 둘도 없는 애처가로 등극했다. 그 덕에 나 또한 '암은 걸렸지만 세상 좋은 남편을 둔 행복한 여자'로 질투를 받기도 했다. 아마도 뭇여자들의 지탄을 받을까 배려하여 분량과 등장 횟수를 대폭 줄였더니만. 이런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 같다. 여하튼 고맙게도 남편은 나를 철의 여인으로 대접했다. 고급진 표현으로 초지일관이라 해야 할까. 암이란 이벤트가 있었는지조차 헷갈릴 만큼 한결같은 그. 복직 후 이전과 같은 워킹맘의 삶이 데자뷔처럼 펼쳐졌다. 가뜩이나 사회복귀 초반 위축됐던 몸과 마음 때문인지 서운함, 분노, 피로, 원망은 커졌다. '제발 날 좀 도와줘.'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남편도 암환자의 보호자라는 무게감과 힘듦이 있었으리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당장 내 몸이 힘드니 그의 속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장서갈등'이라는 트렌드를 몸소 경험으로 깨달았던 엄마와 남편의 관계. 암과의 트레이드오프 중 나름 큰 수확이라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었는지. 슬금슬금 개전의 기미가 보이더니 그전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 텐션이 올라가면서 다시 긴장감도 극대화 됐다.
딸을 넘어서서 심적인 동반자이나, 크고 작은 일을 살피는 집사이기도 했던 역할도 복직을 한 느낌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아픈 엄마라 미안하고 고마운 복합적인 감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힘든데 어리광만 부리거나 집안일을 돕지 않으니 서운했다. 어쩌면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나 애틋함이 없는 건가 싶었다.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잘못 키우는 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저한테 도대체 왜들 이러세요'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또 아파야 휴전이 되려나'하는 억지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예전 같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양쪽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을 텐데, 이제 선택적 무대응과 적절한 외면이라는 보호막을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주변인의 마음과 관계까지 내 힘으로 억지로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스스로를 아끼고 보호해야 하니까.
짧은 글에 담았지만 치료 후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치료를 마친 뒤 일상에서의 변화는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익숙해질 공간이 있어서 조금씩 서서히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이제 암 걸렸으니 다 내려놓고 나만 생각하며 살라고 하지만, 다 접고 산에 들어간 자연인도 아니고 현생에서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혹여나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려놓음이 혼자서 벽을 치고 주위를 보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복직 후 물리적인 시간의 부족, 체력의 고갈, 정신적인 피로감이 커졌다. 그런 상태이니 이전이라면 적당히 넘겼을 작은 자극조차도 증폭되어 마음을 헤집었던 것 같다. 복직 후 자주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다던 아이들의 볼멘 말을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아이들은 말이라도 하지, 다른 가족들은 아마도 상태를 알면서도 미처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쟤가 오죽 힘들면 저럴까' 혹은 '저도 마음대로 안되니 얼마나 속상할까' 안타까워하면서.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져서 평온한 일상을 찾기를 바라면서. 가족은 일상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니 곁에서 지켜보는 동안 나만큼이나 속 끓이고 힘들었을 텐데. 결국 문제는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아니라, 나의 마음가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1인 다역의 역할들을 내려놓은 건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고 서운했다.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의 차이랄까. 이렇게 건강해져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역할을 꼭 다시 하고 싶었던 그때의 간절함을 떠올려본다. 지금 이렇게 잘 지내게 된 건 나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노력하고, 아껴준 덕분이니까. 다시 나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