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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Aug 03. 2024

아픈 엄마가 아닌, 꿋꿋하고 용감한 엄마로 기억되길

어린 자녀를 둔 엄마 환우들을 위한 응원과 바램

세상 모든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무엇과도 바꿀 수도 없는 절대적인 존재는 아마 자식이지 않을까 싶다. (아, 가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정한 모정 내지 상식 외의 희한한 사례들은 논외로 하려고 한다.)


아픈 엄마. 암환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갖게 된 또 다른 타이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이가 없더라도, 다들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아프더라도 다 내팽개치고 나만 돌보거나, 그러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다만 뱃속에서 열 달을 품었다가 세상에 내어놓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잘 키워야 할 책임이 있기에, 자식과의 인연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배우자, 부모, 형제와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


그렇기에 내가 아픈 것보다도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 마음이 쓰였다. 어떻게 병을 알려야 할지, 치료 중 어떻게 돌봐야 할지,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을지, 혹여나 아이가 상처받거나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은 우연히 찾아왔다. 치료는 나의 몫이지만 그로 인해 달라지는 것들과 주위 사람들의 받아들임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치료 중 친하게 지냈던 후배에게 소식을 전했다. 많이 놀랐을 텐데도 똑똑하고 예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릴 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가 많이 아팠었어요. 항암 치료도 했고, 꽤 긴 치료에 많이 힘드셨지만,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세요. 언니도 잘 이겨낼 거예요. 저도 마음으로 응원할게요!"


'아, 나의 아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구나'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지, 또 아팠던 엄마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게 되었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지금은 동글동글 푸근한 인심의 몸도 마음도 넉넉한 할머니가 된 나의 엄마. 어린 시절 엄마는 많이 말랐다. 갸냘프고 여리하다는 표현을 쓰기 어려운, 40킬로도 안 됐던 몸무게. 그 몸으로 혼자 두 자식을 키워내느라 부단히 애를 썼다. 말라도 건강한 사람도 있건만, 엄마는 선천적으로 입이 짧고 소화기관이 약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느 하굣길. 잘 먹지 못하고 위경련이 심하게 온 엄마는 병실에서 지친 듯이 쓰러져 링거를 맞고 있었다. 침대 옆에서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 어린 눈에도 엄마가 안쓰러웠고,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속상했다. 그저 '얼른 돈을 벌어서 엄마를 편하게 해 줘야지. 비싸고 좋은 약으로 안 아프게 해 줘야지' 다짐했을 뿐. 유년 시절의 다른 좋은 추억도 많지만, 유독 여리고 아팠던 엄마의 모습은 시간이 훌쩍 흘러 나이가 마흔이 넘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진단을 받았을 때 초등학교 5학년, 2학년이었던 아이들.  당시에는 차라리 기억을 못 할 만큼 어렸으면, 혹은 차라리 이미 훌쩍 컸으면 이런저런 고민이 덜할까 원망도 했다. 당장 내 몸부터 챙기고, 살고 봐야지 싶으면서도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민머리를 보며 놀라지는 않을지, 혹시나 상처를 받는 건 아닐지. 그랬는데 어느새 4년의 시간이 흘러 큰 아이는 중3, 둘째는 6학년이 되었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중2병의 예민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들, 덩치는 나만큼 컸는데도 아직 여전히 껌딱지인 딸.


그때는 차마 조심스러워 묻지 못했던 말을 이제는 매우 자연스럽게(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물었다.

"얘들아, 엄마 많이 아팠잖아. 머리도 없고, 짜증도 많이 내고... 그때 어땠어?"

말하다 보니 조금 긴장도 되고, 사뭇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고 물었지만, 역시나 반전은 없다.


"어?"

갑자기 생뚱맞게 웬 말도 안 되는 질문이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큰 아이. 대답이 아닌 반문을 날리고 방으로 쓱 들어가 버린다. 헉.


그래도 아직 껌딱지인 딸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을 강요(?)했다.

"어? 응"

대답을 망설이는 아이에게 이제 나았으니 괜찮다며 치근대기 시전.


"음... 실은 엄마가 아파서 하늘나라 갈까 봐 겁나고 무서웠어. 근데 그래도 엄마가 회사 안 가고 집에 있어서 좋았어"

아... 그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각별한 관계인 엄마가 멀리 떠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구나. 그래도 빡빡머리 엄마였지만 함께여서 좋았다니... 내 사랑 미안하고 고마워. 내년이면 중학생인데도 그 바람은 여전하단다. 엄마가 회사에 안 가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있으면 좋겠다고. 주위를 보면 아이들이 머리가 크면 엄마가 일을 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데(잔소리 원천차단 & 경제적인 윤택함). 이러니 도저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의 애틋했던 그 마음과 달리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느 집처럼 대화의 절반은 방청소, 씻기, 숙제, 공부 등등 잔소리로 채워지지만,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선택했던 입원, 잠 못 드는 긴긴밤 내도록 그리웠던 것들. 오동통한 딸내미의 뱃살을 슬라임처럼 쪼물딱 거리기, 새근새근 잠든 통통한 딸아이 볼 쓰다듬기, 무심한 듯하지만 싱긋이 웃으며 장난을 치는 아들과의 투닥거림, 개떡 같은 음식 솜씨에도 항상 엄마 요리가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모습, 마음만 가득했던 가족여행. 이렇게 북적거리는 일상과  잔소리조차도 그립던 간절함.


먼 훗날 아이들이 자라서, 엄마 아빠가 되면 가끔 지금의 이 시간들이 생각나겠지? 그 기억이 슬픔과 두려움으로 채색되는게 아니라 무섭고 힘들었지만  따뜻한 해피엔딩의 스토리면 좋겠다. 아픈 엄마가 아닌 꿋꿋하고 용감한, 포기하지 않는 엄마로 기억되기를.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지으며, 그 순간에 감사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되기를.


엄마도 지금 이렇게 너희의 엄마로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단다. 사랑한다 나의 보물들.   

  JupiLu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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