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첫 여친, 첫 남친, 두 사람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 첫 경험들은 걸음마를 처음 뗀 돌 지난 아기의 환희였다. 손잡고 교정을 걷는 게 처음이었고, 전철 출입문 앞에 서로의 몸을 기대 서있는 게 처음이었다. 카페 소파에 나란히 손깍지를 끼고 앉는 것, 극장에서 시트의 팔걸이를 젖히고 서로의 팔을 포개는 것도. 그리고 이제 첫 키스의 날도 올 것이다. 하지만 도재는 사귄 지 두 달이 넘어가도록 조심하며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좀 덜 조심해도 되는데’
서민은 인내심이 없었다.
여름이 물러간 가을 초입의 어느 날, 그날도 도재는 서민의 손을 잡고 자취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어둑한 인도 위에 박스들을 정리하는 마트 사장님을 지나쳐 자취방 골목길에 들어섰다. 뒤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집에서 풍겨오는 김치찌개 냄새가 칼칼하게 스쳐 지나간다.
도재와 서민은 키 차이가 딱 27cm. 서민이 뒤꿈치를 바짝 들고 고개까지 치켜들어도 도재의 입술에 서민의 입술이 닿지 않는 키 차이였다. 서민은 이미 그 계산까지 마친 상태로 자취방 앞 골목에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도재를 살짝 끌어 집 입구 턱 앞으로 데려와 세운다. 그리고 자신은 그 턱에 올라서서 도재를 향해 입술을 내민다. 첫 뽀뽀를 목표로 용기를 내어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향해 나아가는데... 어? 도재에게 채 닿기도 전에 몸이 휘청, 올라선 턱에서 떨어져 버린다. 황급히 내민 도재의 손을 잡지도 못한 채 서민은 인사도 없이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망함에 머리를 침대 가운데 깊숙이 박고 주먹질을 해대는 서민.
띠릭-
-좀 진정되면 잠깐만 나와봐. 줄 거 있어.
문자 알림 소리에 주먹질이 멈추고 문자를 보자 이성이 돌아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뚝딱이는 몸도 고쳐 본다. 서민은 어색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며 나간다. 자취방 문을 나서 천천히 걸어 나가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도재가 팔을 뻗어 서민을 안아 입을 맞춘다.
찌이이이잉-------
어디선가 전기가 충돌하는 듯한 파장이 서민의 머리를 타고 지나간다. 차가운 이미지의 도재이지만 입술은 무엇보다 뜨거웠기에 그 대비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입술이 서서히 멀어지고 감았던 눈이 천천히 떠진다. 도재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얼굴을 올려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정수리가 뜨겁다 느껴지는 걸 봐선 도재의 떨림도 못지않으리라 짐작한다. 서민의 잡혀 있던 허리가 느슨해지더니, 도재의 손이 서민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펼쳐보니 abc 초콜릿 하나.
“오늘 밤 달콤하라고. 갈게.”
모든 게 순식간이라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서민인데, 도재는 저리 한 마디 남기고 훅 가버린다.
“아… 첫 키스… 진짜 해버렸다…”
서민은 그 자리에 서서 입술에 닿는 바람을 막으며, 아직도 남아있는 도재의 달콤했던 여운을 느껴본다. 입꼬리를 틀어막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키스 한 번으로 한순간에 심장 깊숙이 서민의 감각이 닿았다. 서민은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감각들을 느끼게 해 줄지 기대가 되었다.
학교 갈 준비로 분주한 아침. 서민은 빠르게 세수하고 양치를 한다. 그러다 문득 어제의 키스가 생각나 고개를 세면대에 박는다. 서민의 입이 한없이 빨개진 귀에 걸린다. 웃음이 새어 나는 얼굴 위로 티셔츠를 입고 은색 아이리버 MP3를 목에 걸고 문을 나선다.
저 멀리 도재가 보인다. 도재가 보일 때면 늘 조금이라도 빨리 가까이 있고 싶어 달려갔었는데, 오늘따라 어제의 기억이 자꾸 발을 붙잡는다. 고개를 숙인 채 혼자 베실 웃다가 정신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도재가 벌써 가까이에 와 있다. 늘 굳은 표정의 도재가 입가를 살짝 올릴 때, 서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내 사람 같다’는 말도 안 되는 확신이 올라왔다. 그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아 서민은 생각보다 더 큰 목소리로 불러버렸다.
“낭구우운!”
서민도 말해 놓고 살짝 놀라 버린 호칭. 그러나 자연스러웠다. 도재도 놀란 듯했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얼굴이다. 낭군― 도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호칭이다. 그 이후 도재는 서민을 “꿍돌이”라는 애칭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뜻이냐 물으면 그냥 그 귀여움이 서민을 닮았다고만 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냉랭하고 철저하게 이성적이던 도재의 언어에는 어느새 서민의 내음과 흔적들이 가득하게 되었다.
다시 찾아온 새 학기 중간고사. 서민은 도재와 하나라도 같은 수업을 듣고 싶어서 원치 않았던 “교양 일본어”수업을 넣었다. 이미 일본어를 잘하던 도재와 달리 히라가나도 모르던 서민. 수업 진도가 너무 빠르고 시험 범위도 어마하게 많아 맥이 풀린다. 그러다 벌써 시험 내용을 다 외워 슥슥 써내려 가는 도재를 보며, 서민의 머릿속에서 잔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낭군!”
“응?”
빠르게 흔들거리던 도재의 볼펜이 멈춘다.
“교수님 안 보실 때 잽싸게 내 시험지랑 바꿔서 답을 써주라!”
잠깐의 정적, 주변의 작은 소음들까지도 먹어 삼킨다. 그리고 도재의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더니 눈 아래엔 힘이 들어간다. 편의점 안 아이스크림 냉장고 문을 연 듯 한기가 으슬으슬 새어 나온다. 사귀게 된 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싸늘함이었다.
“치이…”
냉기가 들어차 시린 마음을 부여잡자, 토라진 바람이 새어 나온다.
“공부해.”
도재는 포옹의 한 마디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연습장을 툭 돌리고, 볼펜을 바삐 움직인다. 그 말은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실망한 선생님’ 같았다. 그 차가움에 서민은 처음으로 서운할 뻔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도재가 반듯하고 멋져 보였다.
서민은 도재와 함께하게 되면서 예전보다 술을 덜 마시고, 도서관에 좀 더 자주 가게 되는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을 땐 절제하지 못하고 취하는 일이 빈번했다.
한여름의 밤기운에 청춘을 다 불사르려 작정한 듯, 서민은 친구들과 신이 나 술을 마시며, 즉흥이 흥을 부르고 흥이 술을 불러 거나하게 취해 집에 돌아갔다.
정신 붙들고 집을 잘 찾아간 것도 칭찬해야 할 정도. 그리고 방 침대를 보자마자 씻지도 않고,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렌즈를 빼지도 않은 채 잠이 들어 버린다.
‘아침인가?’
가방까지 멘 채 엎드려 잠들었다 보니, 너무 불편해 삐그덕 삐그덕 일어나 보는 서민.
‘아... 이런... 빨리 샤워부터 해야겠다’
무거운 몸을 두 팔로 힘겹게 밀며, 더 무거운 눈꺼풀도 힘주어 들어 본다.
‘아아아악!’
그런데 눈이 접착제에 붙은 듯 떠지지 않는다. 뜨려고 힘을 줄수록 통증이 밀려온다. 너무도 큰 이물감에 서민은 눈물이 철철 나고 그저 괴롭다.
‘이게 뭐야… 어떡해…’
감긴 눈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손으로 침대를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1번을 꾹 누른다.
“낭구운! 으허어엉어엉”
“무슨 일이야?”
늘 침착하고 정적인 도재의 목소리가 그 작은 핸드폰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나 눈이 너무 아파... 렌즈가 눈 뒤로 들어간 거 같아. 으허어엉. 나 어떡해... 눈이 안 보여...”
이번엔 짧은 한숨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급한 도재의 목소리만 울렸다.
“내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도재는 정말 빠르게 도착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그 속도에 놀라고 또 든든했다. 도재는 서민을 택시에 태워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와 약을 뿌리고, 서민의 눈을 살짝 뒤집더니 렌즈를 쓱, 빼냈다.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고 빠르게 끝난 처치. 이젠 눈이 아프지 않다.
“렌즈 끼고 자면 안 돼요. 심하면 아예 붙어 버려요”
“네에…”
조심스레 대답하는 서민의 머리 위로, 차갑고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애써 모른 척하며 서민은 비음을 섞어 도재 팔을 흔든다.
“낭군~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 히힛,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러나 서민의 애교에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시작된 취조 시간.
“어제 얼마나 마셨어”
도재의 한 음 더 낮아진 목소리에 서민의 손가락 검지가 서로 부딪히며 눈동자가 도재의 발끝으로 향한다.
“아 그게 윤정이랑 혜인이랑 오랜만에 너무 신이 나서…”
“얼마나 마셨냐고”
같은 질문이 다시 온다. 서민은 순간 교무실 앞에 선 기분이 든다.
“하…한 병인가”
도재의 눈빛이 가늘어지며 서늘한 기운을 쏟아낸다. 서민의 정수리 위 공기가 차가워졌다.
“두... 병...”
서민의 어깨가 좁아진다. 표정 하나 안 변한 도재였지만, 화가 오르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럴 땐 무조건 납작 엎드려야 한다. 서민은 엄지와 검지를 얼른 모아, 볼에 붙이고 열심히 비비며 도재를 향해 눈을 찡긋한다.
“미안해요, 낭군~”
도재의 눈동자가 눈 끝에 걸린다. 한 번 더 힘이 들어가더니, ‘하아~’ 짧은 한숨을 뱉는다. 그 한숨을 보자, ‘후우~ 이제야 살았다’ 서민은 속으로 몰래 안도한다. 그때, 도재의 손이 서민의 볼을 꼬집어 올린다.
“으이구~ 이 꿍돌이 녀석!”
두 살이 많은 서민의 나이가 무색하게 도재는 늘 조용히 서민을 지켜보고 챙겨주고 보호해주고 있었다. 서민은 그대로 도재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가슴에 묻는다. 도재의 냄새가 났다. 도재의 향기로 호흡하던 서민은 도재가 걱정하고 관리해주는 그 사랑의 모습이 꽤나 흡족해 가슴에 묻은 얼굴을 살살 비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