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이십 년이 지났다. 물이 바위를 닳아 없앨 수 있을 만큼 집요한 시간이다. 많은 게 바래고 지워졌지만 첫사랑의 그날만은 아직도 서민의 눈앞에 재생된다. 그날의 설렘, 그날의 목소리. 모든 것이 생생하다.
“서민아”
도재의 낯선 호칭에 서민의 시선이 허공을 헤맨다.
“이제 누나라고 안 불러.”
도재의 가느다란 눈에 웃음이 살짝 머무른다.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바뀌어 올 수 있는 거지?”
서민의 커진 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도재가 비친다. 도재의 눈에 머물렀던 웃음이 천천히 입꼬리로 내려온다.
“나 원래 이래.”
도재는 멍해진 서민의 손을 잡는다. 갑작스러운 손의 열감이 서민의 얼굴을 데운다.
“진작 잡을 걸.”
말은 별로 없지만 가끔 툭툭 던지는 말은 이상할 만큼 강하게 설렌다. 서민의 심장에 날개가 돋아나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오늘 저녁 먹자 나랑.”
도재의 갑작스러운 속도에 서민이 느려진다.
“어, 어딜?”
“어딘가 분위기 괜찮은 곳.”
도재는 자꾸 말이 더듬어지는 서민의 머리 위를 툭툭 손가락 끝으로 두드린다.
“머리띠는 두고 와.”
허겁지겁 머리 위를 손으로 덮는 서민.
“야! 너 그거 기억하냐?”
“응. 평생.”
서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히 알면서 그걸 즐기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다.
“그 머리띠 나한테 고백받을 때 쓰고 있던 거잖아. 웃기지만 귀여웠어.”
서민은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다. 머리띠 하나가 이렇게 굴욕이 될 줄이야… 아니, 로맨스인가.
그날 밤, 자취방에 돌아온 서민은 가방과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침대로 날아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팔다리를 흔들어 대며, 그날 정신없이 휘몰아쳤던 도재의 말과 행동을 털어 본다. 흐트러진 머리와 벌게진 얼굴을 들자 베개 옆에 놓인 보라색 꽃 머리띠가 눈에 들어온다.
큭!
평생 놀림당할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 머리띠가 사랑스럽다 느껴진다. 앙 다문 입술에 미소가 번지며 서민은 머리띠를 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넘긴다.
도재의 집은 서민의 자취방에서 전철 두 정거장 거리. 그 덕에 두 사람은 걸어서 중간 지점에서 만나곤 했다. 서민은 도재를 만나러 걸어가는 그 길이 매일매일 새로웠다. 오래된 2층 건물들 사이, 낡은 암체어에 앉아 낮잠 자던 하얀 말티즈, 고무 앞치마를 두른 채 담배를 빠는 정육점 아저씨. 그런 풍경들이 지나고 나면 도재가 보였다. 어느 날은 느와루 영화의 한 장면이었고, 어느 날은 로맨스였다.
장마가 시작된 날 오후. 촘촘하게 쏟아지는 빗물에 지나가는 행인과 자동차, 비닐 덮인 음료박스까지 온 세상이 모자이크로 표시된 듯 흐려졌다. 도재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이 오늘은 드라마다.
검은 챙 넓은 우산을 쓴 도재가 보인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닿아 서로의 손을 맞잡고 웃고 있다. 도재는 자연스레 서민의 우산을 접어들고 자신의 우산 안으로 서민을 끌어당긴다. 빗물을 피하기 위해 도재의 옆 가슴과 허리에 밀착된 서민. 쏟아지는 빗물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느껴져 봄날이 거꾸로 돌아온 듯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도재의 친구인 서민의 후배가 걸어오는 걸 서민이 먼저 발견한다. 두 사람이 사귀는 걸 아직 밝히지 않은 서민은 동공이 요동치며 발걸음이 멈춘다. 그리고 빠르게 도재의 손에서 우산을 뺏듯이 잡아들고 방패로 삼아 자신과 도재의 모습을 완벽히 숨겨버린다.
그 친구가 지나쳐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있느라 두 사람의 머리와 옷이 젖어들고 있었다. 도재는 웃음을 참는 것인지, 떨어지는 빗방울이 불편한 건지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지며 서민을 바라본다.
“휴우, 진짜 큰일 날 뻔했어.”
그 후배를 피하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렸던 서민이 우산을 고쳐 들며 참았던 숨을 토한다. 그러다 고개를 들자 도재의 묘한 눈빛과 마주친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도재를 보며 뒤늦은 미안함에 입술을 앙 문다. 그 모습까지 보고 나자 도재는 참았던 웃음을 크게 빗물 속으로 던지다.
“하하하! 방금 그게 더 눈에 띄고 이상했던 거 알지?”
도재도 저렇게 호탕하게 웃는 사람이구나, 처음 보는 서민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발견과 별개로 부끄러워진 볼이 발 끝으로 도망한다. 터진 웃음이 잦아든 도재는 서민을 바라보는 눈이 더욱 사랑으로 빛난다. 그 눈빛에 부끄러움은 잦아들고, 설렘으로 차오른 자존감이 조용히 마음을 채운다. 서민은 웃었다. 이게 사랑하는 기분이구나. 나만의 우주에 그 사람의 우주가 더해지는 것, 그래서 더 밝게 빛나는.
서민은 남녀 가리지 않고 친한 친구와는 항상 허물없이 지내왔다. 서민이 도재보다 두 살 많다 보니 서민의 친구들이 도재에겐 모두 과 선배들이었다.
친구 승현이와 오랜만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저녁. 저렴한 삼겹살 값만큼 신경 쓰지 않은 기름진 벽지, 그리고 그 위에 붙은 장동건 얼굴에는 검정 매직으로 낙서가 가득하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서민은 연신 소주잔을 부닥치며 술을 꽤나 마시고 있었다. 기분 좋게 마신 술이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다 뇌하수체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서민은 술잔을 탕, 내려놓으며 망설임 없이 승현에게 선포한다.
“나 도재랑… 사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승현의 큰 소리가 터졌다.
“야! 김서민! 드디어! 축하한다!”
얼굴이 붉어진 서민이 어색하게 웃자, 승현은 손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럼 도재를 나한테 다시 인사시켜야지. 남친으로! 빨리 불러!”
그리고는 감탄처럼 중얼거린다.
“도재는 진짜 진국이지. 남자애들이 다들 인정했었어. 너 제대로 잡았다, 김서민!”
늘 말 많고 행동이 과장스러운 승현. 오늘 유독 그 성격이 폭발한다. 서민은 승현의 말에 마음이 으쓱해진다. 그래서 도재가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 전화기를 집어 든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며 군청색 라운드 티셔츠에 베이지 면바지를 입은 도재가 들어온다. 갑자기 불러내 나온 것치고 매우 단정하다. 그리고 늘 그러듯 도재의 표정이나 기분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갑자기 불러내어 기분 상했으면 어쩌지? 이미 저질러 놓고 뒤늦은 후회들을 하는 서민이다.
“야! 전도재! 우리 김서민을 데려갔으면 한 잔 받아야지!”
알코올의 힘을 얹어 더 주책맞아진 승현을 도재는 흐트러짐 없이 정중하게 대한다.
“네, 형”
그렇게 몇 잔이 더 오고 간 후, 승현이 갑자기 서민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끌어당긴다.
“우리 서민이한테 잘해줘라. 눈물 나게 하면 내가 가만 안 둔다 너.”
이전의 서민은 승현의 느글거림에 면박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서민에게 올라온 감정은 당황이었다. 그동안 자연스러웠던 승현과의 어깨동무가 오늘은 온몸으로 거부감이 들며 도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표정 변화 없는 도재. 하지만 서민은 느낄 수 있었다. 도재의 등 뒤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그 어둠의 기운. 표정은 고요했지만 마치 어둠 속 오로라 같았다.
“형 많이 취하신 듯한데, 저희 먼저 일어날게요.”
도재는 서민의 손을 끌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뒤늦게 도착한 서민의 다른 친구에게도 바른 인사를 건넨 후 자리를 나온다. 고깃집 문을 열자 고기냄새 없는 한 여름밤의 공기가 두 사람의 숨을 정화시킨다. 도재는 그곳을 나온 후 기분이 나빴다거나, 둘이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길거리 떡볶이 집을 지나 자취방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그저 말없이 스멀한 오로라만 뿜어내고 있을 뿐. 서민은 그 오로라가 무섭기보단 알쏭달쏭하게 설레는 느낌이었다.
서민은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서로 맞추고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긴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