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거리두기

다시스물셋

by 아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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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누구의 마음도 가볍지 않았다

구름이 햇살을 한 층 가린 채 슬며시 내려 앉은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어 쌍커풀 한 줄을 잃은 서민은 1교시 수업이 없는데도 일찍 학교에 나왔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아 시청각실 비어 있는 컴퓨터 앞 의자를 드륵 빼내어 앉는다. 토독토독 옆자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등을 젖힌 채 화면을 응시하는 맞은 편 여학생. 서민의 시간과 공기는 힘을 잃고 느릿하게 흘러가는데 눈 앞의 세상은 정상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서민은 그 속도에 이질감을 느끼며 컴퓨터를 켜고 습관처럼 이메일 계정을 연다.


새 메일이 한 통.

보낸 사람: 도재

제목: 서민누나에게


서민의 눈꺼풀이 깜빡임을 잊는다. 마우스 위에 올려진 손이 멈춘다. 평소 성미 급한 서민이지만 시간이 꽤 오래 모든 근육과 신경이 멈춰선다. 서민의 숨이 살기 위해 깊게 들어왔다 후욱 나가는 순간, 서민은 용기를 내어 메일을 열어본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어.

데려다줬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나 때문에 택시 탄 것 같더라.


오늘 난 정말 싫어.

한심하게 느껴지고,

누나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내가 이기적이었고, 우유부단했고,

누나를 배려하지 못했어…


요즘 누나랑 지내면서

이제 좀 편해졌다고, 잘됐다고…

내심 안도했었는데,

그게 어쩌면 내 행복만 생각한 거였던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너무 미안해…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혹시라도 나 때문에 누나가 변하게 될까봐 걱정돼.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정말…


도재의 메일은 그날 아무 말없이 건네 준 토스트처럼 묵직하게 다가왔다. 서민은 한참 그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읽다가 도재가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 말투들이 서민의 마음 속 어딘가를 흩어 놓는다. 화면 속 글자들이 서서히 눈물에 번져 보이자 고개를 숙여 외면해본다.


“도재야…”


외면한 눈과 다른 마음으로 입에서 짤막이 나온 그 이름. 그런 대답을 줄 거라면 왜 그동안 자신의 속도에 제동을 걸지 않았냐 던지는 원망이었다. 하지만 서민은 다 부질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멍하니 바라본다. 눈물 한 방울이 톡, 오른 손등을 적시자 ‘괜찮아’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따스한 위로를 받은 마음으로 슥 눈물을 훔쳐내고 천천히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어? 서민아!”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인데,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보인다. 서민이 신입생 시절, 서민에게 성급한 고백을 해 캠퍼스 곳곳에 불편함을 주었던 선배다. 그 선배가 군대간 이후로 잘 마주치지 않았었는데 하필 오늘 이 얼굴로 만나다니. 선배는 그저 인사를 하려 부른 거였을 텐데 서민의 숨쉬는 피부 모든 곳에서 어색함이 흘러 나간다.


“어, 오빠! 오랜만이에요. 내가 어제 영화 본다고 밤 새는 바람에 눈도 안 떠지네, 하하! 좋은 하루 보내요.”


대답을 들으려던 말이 아니었으므로 선배가 어떤 말을, 어떤 표정을 하는지 눈과 귀를 닫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빠르게 걸어서 인가, 심장의 요동 때문인가, 숨이 자꾸만 턱에 차 올라 불편했다.

급히 들어간 1층 여자 화장실의 거울 속에, 자신에게 고백하던 그 선배의 얼굴, 그리고 도재에게 고백하던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숨을 고르려 세면대에 올려놓은 두 손에 핏기가 사라질 만큼 힘이 꾹 들어간다. 도재에게 상처받았다 생각한 마음 위로, 도재가 받았을 힘겨움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서민은 눈물이 멈추질 않아 결국 수업 대신 자취방을 택했다. 형광등도, 선풍기도 켜지 않은 채, 눈물을 땀으로 감추려는 듯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숨이 갑갑하면 잠시 이불을 열었다가, 다시 또 뒤집어쓰고 돌아 눕길 반복했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린다.


“김서민! 문 열어! 너 수업도 째고 뭐하는 거야!”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윤정의 걱정이 가득한 외침이었다. 문이 열리자,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서민을 본 윤정이 깊은 숨을 마신다.


“에휴… 상처 세게 받았네.”


윤정의 한숨과 바나나우유가 조용히 침대 옆에 놓였다.


“이놈의 감정 기복은 또 시작이야… 오늘은 내가 대리출석했어. 마지막이니까 다음 수업은 꼭 들어와!”


서민은 그저 고맙고 미안해, 꼼지락거리던 손으로 바나나우유를 집어 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이후 서민은 도재를 마주칠까 늘 주변을 먼저 살폈다. 마주할 때마다 지난날 자신의 무모함과 충동이 민낯으로 올라와 뭇매를 맞아야 했기에 서민은 도재를 보는 게 힘들었다. 내가 좀 더 기다렸더라면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책망도 버거웠다. 그런 와중에 받은 도재의 메일. 그 역시 서민의 무모함을 동조했던 것에 대한 후회이자 깊은 사과였다. 그러나 다시 모든 걸 되돌릴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갈아 엎는 시간들을 지나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볼펜 딸각이는 소리만 간혹 들리는 도서관 한 구석. 감정에 무너져 시험을 망칠 수 없었던 서민의 자리엔 레쓰비 빈 캔들이 쌓여갔다. 그런데 갑자기 책상에 툭 초록매실이 놓인다. 동그래진 눈이 돌아보자 도재가 서 있다. 몸이 굳고 입은 벌어지고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렸다.


“커피 그만 마셔.”


도서관 안의 적막한 공기 사이로 도재의 목소리가 던져진다. 말은 평소처럼 덤덤한데 그 눈빛엔 서민만큼이나 피로와 걱정이 겹쳐 있었다. 순간, 서민의 심장이 요동친다. 애써 다잡아 가던 자신의 마음을 흩어 놓고 가는 도재가 원망스러운데, 자꾸만 달라진 도재의 눈빛이 가슴에 걸린다. 결국 서민은 조용히 초록매실을 집어 든다. 뚜껑을 따는 소리가 도서관 가득한 이산화탄소를 깨뜨리듯 작게 울려 퍼진다. 서민의 감춘 마음을 비웃듯, 서민의 진심이 고개를 내밀어 나지막이 속삭인다.


‘너무 좋잖아 이거…’


초록매실 하나가 잊고 싶었던 수많은 감정의 잔해를 건드렸다. 그렇게 고개를 든 감정들은 서민의 마음에 다시금 퍼져 나갔다.




8화. 보라색 꽃 머리띠

뼈는 시간이 지나면 붙고, 기계는 고치면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도 수리도 전부가 아니었다. 결국 상처를 준 사람의 진심이 회복의 관건이었다.

지난한 기말고사가 끝났다. 여름방학, 서민은 어학원에서 강사 알바를 시작했다. 강사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에 앉아 출석부와 프린트물을 챙긴다.


“누나! 오늘 시험 없죠?”


고1 남학생 하나가 문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누나누나 하며 서민을 흔들어 댄다. 서민은 단호함이 부족해 그 학생이 그저 난처했다. 방학으로 한산한 교정. 에어컨 없는 과방의 열기는 서민의 마음을 더욱 갑갑하게 눌렀다. 친한 남자 동기에게 신랑인 척 학원에 한 번만 찾아와 달라 어이없는 부탁을 했다. 그 자리 구석엔 묵묵히 아무 말없이 듣고 있던 도재도 있었다.


녹록치 않은 강사일, 불편하고 난처한 고1 수강생에게 기력이 빨린 서민은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마다한 채 자취방으로 향했다.


툭, 툭.


가방과 핸드폰을 성의 없이 침대에 던지고 아침부터 바닥에 누워있던 티셔츠와 바지로 갈아입는다. 단발머리라 묶이지 않아 엄마가 사준, 그러나 절대 서민의 스타일은 아닌 보라색 꽃이 크게 달린 머리띠를 집어 들어 귀찮은 머리카락들을 넘겨버린다. 서민이 없는 시간 동안 방에 쌓인 더위와 먼지를 선풍기 3단 회전으로 날려본다. 영화 하나만 보고 씻어야겠다. 그리고 멍하니 노트북을 켠다.


띠릭-


일부러 도재 번호를 지워버린 터라 이름은 뜨지 않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


-신랑 역할 그거 내가 해도 될까?


핸드폰을 쥔 손이 허벅지 위로 떨어지고, 기대 앉은 컴퓨터 의자 바퀴가 뒤로 살짝 밀린다. 심장과 두뇌가 격렬하게 대치하는 사이 두 번째 문자가 온다.


-나 누나 집 앞인데 잠깐만 나올 수 있어?


놀란 서민의 눈이 자취방 문을 향한다. 두 손이 머리를 쥐어 감싸며 책상에 꽂는다.


‘하필 지금? 이 꼴로? 씻고 나갈까?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늘 제자리에 서서 침묵하던 도재가 왜 갑자기 성큼 자신의 자취방 문 앞까지 온건가. 이해되지 않고 겁이 난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옷장 옆에 걸린 거울 속에 멈춰 선다. 머리띠를 쓴 모습이 마치 댄스 수업 가는 큰이모 같았다. 서민의 마음이 우당탕탕 걸려 넘어지느라 시간이 또 흘러버렸다. 더 기다리게 할 수 없다 생각한 서민은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 보라 꽃 머리띠를 하고 나가버린다.

흠칫!

보았다. 도재의 당혹한 눈빛. 하지만 서민의 닫힌 마음과 습한 열기에 막혀 서민에게 닿지 않는다.


“누나”


확신에 찬 도재의 눈빛 때문일까? 그 목소리는 확실하게 서민에게 닿았다.


“어…”


반가운지 설레는지 두려운지 알 수 없는 자신의 마음만큼, 그날의 풍경도, 더위를 품은 공기도, 모든 게 혼란스럽게 엉켜 서민을 묶는다.


“아직 늦은 게 아니라면, 나 이제 누나 손을 잡아도 될까?”


푹 수그려 있던 보라색 꽃이 고개를 든다. 서민을 동여맨 그 감정의 열기가 툭 끊긴다.


“그런데 너 두 달 있다가 입대잖아.”


서민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평소라면 도재에게 준비된 대답이 있었겠지만, 이번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건…”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을 딸싹이며 대답을 바로 찾아내지 못하는 도재.


“일단 입대 문제 어떻게 해봐. 그러면 대답할게!”


서민은 마치 술래잡기가 시작이라도 된 듯 빠르게 뒤돌아 달려 들어갔다. 도재의 갑작스러운 고백도 혼란스러운데, 자신이 뱉은 말이 더 어이가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그거뿐이라 방에 들어와 한참 얼굴을 감싸고 앉아있다. 보라색 꽃 머리띠를 훅 빼어 침대 위로 던져버리는 서민. 도재는 지금쯤 돌아갔는지, 아직 문 앞에 서 있는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다. 도재 역시 서민을 불러 잡지도 전화를 해 다시 불러 내지도 않았다.


서민은 침대에 누워 천장의 꽃무늬 하나에 시선을 꽂은 채 한참을 생각한다. 도재는 무엇 때문에 마음이 바뀐 걸까. 서민이 간절히 원했던 도재의 대답을 드디어 들었는데, 어째서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오는 걸까. 질문들이 세포 분열하듯 끊임없이 넘쳐 흘렀다. 천장에 꽃들이 매직아이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은 오래지 않아 잠으로 이어졌다.




9화. 떡볶이 옆 오뎅 국물

다음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독 서민의 걸음을 삼키는 밤이었다. 오늘의 5호선은 연착으로 사람도 많았다. 전철 안, 에어컨이 켜졌지만 가득 찬 사람들의 호흡으로 실내는 후끈했다. 전철이 서민을 뱉어 내자 뜨끈한 바깥의 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누나!”


마치 확성기를 타고 날아오 듯 도재의 목소리가 서민의 등에 크게 닿는다.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는 서민의 몸이 채 따라 돌기 전,


“나 군대 연기하기로 했어.”


서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재의 표정에는 확신의 기쁨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입대는 서민이 당황해 아무렇게 뱉은 말이었는데 도재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겼다. 이미 서민의 결정은 도재에게 닿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 그 먼지 속 냄새를 풍기는 길거리 떡볶이. 두 사람을 둘러싼 배경이 줌아웃되며 모습도 소리도 희뿌옇게 흐려져 간다. 그때 서민의 손에 닿은 낯설지만 따뜻한 체온이 서민의 잃어버린 렌즈 초점을 맞춰온다.


어떻게 마음이 바로 이렇게 대답을 해버리나 서민은 배신감을 느낀다. 하지만 도재의 체온과 부드러운 미소를 느끼자 특유의 흐드러진 웃음이 새어 나오고, 그 눈을 들키기 싫어 손이 잡힌 채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해 고개를 들어 묻는다.


“그때는 왜 나 거절했어?”


갑작스러운 정색에 도재의 잡은 손이 흔들린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정성 있는 대답을 주기 위해 애쓰는 듯 한참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땐 내 마음에 확신이 없었어. 괜히 성급하게 시작했다가 상처 줄까봐. 날 좋아한다는 그 말을 받을 수가 없더라.”


이제 서민의 눈엔 놀람 대신 기대가 반짝반짝 빛난다.


“지금은?”

“지금은 확실해.”


도재의 말은 짧았지만 그 눈빛과 잡은 손으로 충분한 확신을 주고 있었다. 서민은 거절당한 이후 상처받지 않겠다고 좋아하던 마음을 꾸깃꾸깃 쑤셔 놓았었다. 그러나 도재의 따스한 체온이 손을 타고 들어와 마음 깊이까지 전해지자, 물리적으로 정말 존재하는 듯 느껴졌던 그 감정의 찌꺼기들이, 떡볶이 옆 오뎅 국물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과 함께 스르르 흩어졌다.


그날 밤, 서민은 윤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도재랑 사귄다.

-우와 축하해! 드디어 솔로 탈출! 한 잔 해야지!

-근데 일단 주변에 비밀로 하려고. 아무한테 말하지 말아줘.

-내 걱정 말고 네 입이나 조심해.


그리고 다음 문자를 작성하려던 서민의 손이 민망한 듯 수그러든다.


-나... 도재 너무 좋아. 지금 꿈만 같아


썼다가 지운다. 윤정에게조차 말하기 부끄러운, 믿기지 않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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