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한 단계 더

다시스물셋

by 아슈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_-014 (2).jpg


19화. 노란 프리지어의 사랑

옷이 한 겹 더 두꺼워질 무렵,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오늘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지 백 번째 되는 날이었다.


서민은 강사 일을 마친 후 지친 몸을 끌어와 전철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넘치는 힘과 괴성을 자랑하는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한다. 코 끝을 한 번 찡그리며 고개를 드는데, 창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도재였다. 서민은 눈이 커지며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문이 열리자 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순간 서민은 한 발짝 물러서 그 자리에 굳었다. 꽃을 든 도재가 전철 조명 아래로 걸어 나왔다. 광고 속 남주처럼 현실보다 더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 백일이잖아.”


그의 말은 내레이션 같았지만 서민의 눈앞엔 불꽃같은 감정들이 터졌다. 서민은 그대로 도재에게 달려가 안겼다. 볼을 비비고 깡충 뛰어올라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팝핑캔디처럼 터져 나오는 서민의 사랑 표현에 도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노란 프리지어 너무 예쁘다.”


꽃다발에 연신 코를 들이밀며 함빡 웃는 서민의 얼굴 가까이로, 뒷짐 진 도재의 얼굴이 내려온다.


“딱 꿍돌이 같아서 골랐어.”


도재와 서민의 마주한 얼굴 사이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프리지어 향기가 파고든다.

다음 전철을 기다리며, 서민은 꽃을 안은 채 도재의 팔짱을 꼭 끼고 물었다.


“근데 내가 여기서 타는 거 어떻게 알았어?”

“항상 그 자리 타잖아. 환승 제일 빠른 데.”


그 짧은 말 안에 담긴 것이 많았다. 내가 모르는 순간에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 나보다 나를 더 오래 지켜 봐주는 사람. 서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도재의 사랑은 크고 성숙해서 자신의 조급하고 철없는 감정조차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와 나란히 보듬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화.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구매욕을 자극하는 쿠폰, 포인트들. 이들은 사랑에도 매우 유효하다. 도재와 서민은 데이트할 때 포인트 제도를 만들었다. 뭔가를 잘하면 10점, 잘못하면 10점 감점. 100점을 채우면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이었다. 술 먹고 사고를 많이 치는 서민은 늘 점수가 바닥이었다. 도재가 100점을 세 번이나 채우는 동안, 서민은 간신히 딱 한 번, 그 앙큼하게 비디오방 데이트를 간 날 채웠다.


어두컴컴한 네모 상자 속, 출입문엔 큰 창이 있었지만 사장님은 그곳에 꽃무늬 시트지를 발라 두셨다. 스크린 앞 커다란 소파 위에 나란히 앉은 서민이 도재를 향해 몸을 돌린다.


“나 100점 채웠어. 소원 들어줘!”

“꿍돌이 드디어 채웠네! 뭐 받고 싶어?”


순간 서민의 장난 세포들이 킥킥, 눈동자로 몰려들었다. 장전…… 발사!


“상의 탈의 보여줘!”


도재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재차 ‘진심이야?’라고 다시 묻는 듯 흔들렸다. 그럼에도 움직임 없이 빤히 도재를 바라보는 서민의 눈을 보자, 잠시 고민하던 도재가 조용히 티셔츠 밑단을 잡고는, 순식간에 머리 위로 휙 벗어버린다.


“으악! 갑자기 그렇게 벗으면 어떡해…”


서민의 두 손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민망해. 빨리 봐. 안 그럼 그냥 다시 입는다.”


서민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얼굴을 가린 손바닥 틈으로 살짝 빼꼼 조심조심 훑어본다.


‘심장아… 잘 붙어 있어라.’


꾸준히 운동하는 도재의 상체는 아찔하게 멋있었다.


“이제 됐지”


도재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티셔츠를 뒤집어쓴다. 그 동작 하나에 서민의 심장은 여기저기로 날뛰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 채 올라올 줄을 몰랐다. 그때 도재가 마치 뜻한 바를 이루었다는 듯 티셔츠를 한 번 툭, 정리하더니 웃음이 번지며 입을 연다.


“다음 소원은 내 차례야.”

“어…어?”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서민의 방 벽지가 온통 도재의 가슴근육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부끄러운데, 자꾸 보고 싶은 위험하고도 두근거리는 상상이 멈출 줄 몰랐다.


결국 잠을 설쳤다. 게다가 초라한 토익 점수까지 서민의 눈 밑을 더욱 그늘지게 했다. 서민의 걱정에 언제나처럼 도재가 팔을 걷어붙인다.


“스터디룸 가서 같이 해보자. 내가 도와줄게.”


책상에 마주 앉자 도재는 과외 선생님처럼 토익 문제집을 넘긴다.


“해석해 봐.”


서민은 우물쭈물하며 읽기 시작한다.


“으음… 그 요리사…”


그 순간 도재의 눈이 커지더니 몸을 숙이며 터지는 웃음을 꾹꾹 누른다.


“낭군 뭐야! 왜 웃어?”

“미안… 아냐, 근데… 하… 꿍돌이 진짜…”


도재는 손으로 웃음을 가렸지만 막지 못했다. 서민은 창피함에 화가 가득한 손으로 문제집을 덮고 일어나려 한다.


“아 진짜 안 해! 웃지 마! 안 해!”


도재가 얼른 서민의 팔을 붙잡는다.


“미안. 안 웃을게. 진짜 안 웃을게.”


도재는 웃음을 꾹 참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Chief Financial Officer는 요리사가 아니고 최고재무책임자야.”


서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몰랐다고! 진짜 나 무시했어!”


서민이 눈을 세모로 치켜뜨자 도재는 조용히 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분홍 상자 하나, 칸초.


“잘하면 주려고 했는데, 사과의 표시로 줄게.”


서민은 어이없으면서도, 그 칸초 한 통에 어느새 마음이 풀려 입꼬리가 올라간다.


“역시 단순해, 내 꿍돌이. 하하하”


얼굴이 다시 붉어진 서민은 괜히 문제집을 펼친다. 도재는 그런 서민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한 문제 한 문제 다시 짚어준다.


도재는 모든 순간마다 서민을 보호하고, 단속하고, 지켜보며 사랑의 모양을 하나씩 견고하게 다져갔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퀘스트를 매일 완수해 나가듯.

그리고 보여주었다. 말로 사랑 표현을 많이 하진 않지만, 누구보다 분명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도재는 때론 골치가 아팠지만, 사랑으로 덮을 수 있었다.




21화. 오늘도 관리받겠어요.

학점관리와 과제로 하루하루가 치열해야 할 시기에, 서민은 하필 스타크래프트에 빠져버린다. 보다 못한 도재가 PC방 금지령을 내리자 서민은 도재에게 도서관 간다 거짓말을 하고 PC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과이다 보니, 너무도 쉽게 서민의 일탈이 도재의 귀에 들어갔다.


“대호 지금 서민이 누나랑 PC방이라는데? 불러?”


친구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 속에 포착된 서민이 이름.


-어디야


서민의 핸드폰 문자창이 반짝인다. 대호와 신나게 질럿 뽑고 있던 서민은 도재의 문자에 손이 느려지고 식은땀이 난다. 상대팀 저글링의 초반 러시를 어찌 막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바로 로그아웃.


“아, 누나! 뭐 한 거예요?”


원망스러운 대호의 말을 뒤로한 채 도서관으로 우다다다 달려간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달래 가며, 핸드폰을 꺼내 톡토독토 빠르게 답하는 서민.


-나 도서관이지


답을 좀 늦게 하긴 했지만 최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


“김!꿍!돌!”


냉랭하게 쏘아진 이름에 놀라 돌아보니 꿍돌이 낚시에 성공한 도재가 보인다.


‘도서관에 있으면서 나 어디냐고 묻다니, 떠 본 거였어.’


둘은 항상 이랬다. 서민이 정신 못 차리고 말썽 부릴 낌새가 보이면, 여지없이 도재가 막아서고, 제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도재가 그 서늘한 눈빛으로 “말해봐” 낮게 말하면 서민은 진실의 물약이라도 마신 듯 술술 사실을 불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이 상황에서 서민은 평소처럼 빠르게 엄지와 검지를 모아 볼 앞에 두고 열심히 비비며 말한다.


“미안해용”


도재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떨구고는 입꼬리 들썩이며 어이없는 듯 중얼거린다.


“진짜 꿍돌이 너…”


결국 도재는 더 이상 잔소리를 얹지 못한 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날 밤, 도재는 서민의 스타 계정 비밀번호를 몰래 바꿔버렸다. 다음날 접속하려던 서민,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보고 하늘을 향해 외친다.


“전! 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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