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욕망은 무죄

다시스물셋

by 아슈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_-016 (1).jpg


22화. 아이스크림을 먹은 이유

사랑은 정해진 공식이 없다. 누군가는 말에, 누군가는 밥상 위에 그 마음을 올린다. 서민은 그동안 자주 말썽을 부린 것이 미안해 손수 만든 음식으로 사과를 담아 전하고 싶었다. 평소 서민의 자취방에 오지 않는 도재였지만 이 날은 꼭 와 달라 신신당부를 했다.

비록 다용도실의 10kg 쌀자루를 뜯어 밥솥에 붓다가 바닥에 쏟았고, 찌개에는 된장 대신 쌈장을 넣었지만,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실수 없는 진심이었다.


“어? 밥 했어?”


현관에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 들어오던 도재의 눈이 이마를 살짝 밀어 올린다. 기대의 마음은 쌀이 쏟아진 부엌과 찌개 옆 쌈장통을 보자 서둘러 뚜껑을 닫고 다시 들어가 버린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밥 하려고 쌀자루를 들었는데… 너무 무거워서 쏟았어.”


놀란 것인지 착잡한 것인지, 도재의 얇은 입술이 살짝 말려들어갔다 나온다.


“서민아”

“응?”

“다음엔 들지 말고 퍼.”


서민의 부끄러움이 모자랐던 두뇌를 탓하는 순간, 큭! 절제된 웃음을 살짝 뱉어 내며 도재는 쏟아진 쌀을 담는다. 그 웃음이, 그 손길이, 서민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리고 부엌이라는 한 공간에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민은 그 어떤 스킨십 보다도 짜릿하고 설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도 서민의 자취방에는 웃음이 섞이고 유쾌함이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자 마치 정전이라도 된 듯 방 안의 공기가 멈춰 섰다. 창 밖으로 간간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만이 잠시 적막을 흩어 놓았다.


말을 꺼내려던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 마주친다. 서민이 당황한 짧은 숨을 들이켜는 순간 도재의 입술이 그 숨과 함께 서민의 입으로 달려들어 온다.


서민은 도재와의 키스가 깊어지면서,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이 스쳐지나갔다. 싫다고 거부하려던 건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이대로 끝까지 간다면 피임은 어떻게 할 수 있지? 도재가 알아서 하는 건가? 서민의 머리에 생각들이 많아지자 잠시 키스에 집중이 어려웠다.


그때, 허리를 잡고 입던 도재의 손이 천천히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민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짤막하게 긴장이 들어가 버렸다.


순간 휘몰아치던 열기가 정지한다. 어색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느리게 떨어지는 도재의 입술. 그리고 도재의 굳게 다문 입 위로 심호흡으로 끌어낸 숨 한 덩어리가 후욱 쏟아져 나온다. 도재의 속을 시끄럽게 하던 열기를 뱉어내서일까. 도재는 멈출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서민의 이마 위에 한 마디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우리, 나가자.”

“어… 응!”


온도차가 컸던 도재의 숨들에 서민은 아직 달뜬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조용하고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도재에 반해 부산스럽게 나갈 채비를 하는 서민.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속도로 같은 문을 나선다.


배스킨라빈스. 파인트 한 통을 다 나눠 먹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지만 서민은 도재가 그동안 자신의 자취방을 잘 오려하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은 알 듯했다.




23화. 같이 씻을래?

며칠 지난 어느 날, 창 밖 새소리와 골목의 소음이 뒤섞여 서민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서민은 그날 자취방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도재의 뜨거운 숨결, 멈춰 준 그 순간의 체온. 그리고 나지막이 “나가자” 말하던 그 눈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괜찮았다고. 무섭거나 놀란 거 아니었다고 말해줄걸.


철저하던 도재가 입대를 미뤘다. 단지 서민과 함께하고 싶어서. 그 한마디는 서민에게 ‘사랑’ 이상의 무게였다. 도재를 더 알고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학교 앞 먹자골목. 기울어진 네온 간판에‘호ㅍ’만 깜빡인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전람회 노래. 그 음악을 훔쳐 들으며 밥과 술을 먹을 수 있는 작은 식당. 서민은 부대찌개를 주문하면서 “이모, 참이슬 한 병이요”라고 외친다. 도재는 조용히 수저와 물컵을 챙긴다. 얼굴이 벌게진 서민의 손을 잡고 자취방으로 향한다. 서민의 긴장과 부끄러움이 술기운에 묻혀 다행이었다. 가로등 어스름한 서민의 자취방 앞, 전봇대에 붙은 찢어진 과외 전단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들어갔다 가.”


서민이 이끄는 손에 도재가 함께 방에 들어선다. 평소와 달리 반듯하게 정리된 방. 침대에 걸터앉은 도재의 무릎 위로 서민이 올라 먼저 입술을 맞춘다. 도재는 처음 보는 서민의 주동적인 스킨십에 눈이 잠깐 커졌지만, 바로 눈을 감고 그녀의 등과 머리를 감싼다. 지난번과는 달리 같은 온도, 같은 속도로 입맞춤이 깊어 간다. 그때 도재의 품에서 살며시 빠져나온 서민은 침대 위에 수건을 곱게 펼쳤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재는 조용히 숨을 고른다. 그리고 갑자기 먼저 샤워를 하겠다며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아 서민은 품 안에 베개를 내려놓고 슬쩍 안을 들여다본다. 샤워기 아래에서 도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벽에 한 손을 짚은 채, 그 물줄기 아래에서 오래도록 고뇌에 빠졌다. 서민은 이불을 끌어안고 도재를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재.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었다. 이 밤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서로가 그동안 키워온 사랑의 확실한 응답이었다는 걸.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깨어난 서민은 곁에서 자고 있는 도재를 바라보다 순간 어젯밤을 떠올린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고 눈도 못 뜬 채 이불을 푹 뒤집어쓴다. 잠에서 깬 도재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울린다.


“잘 잤어?”


이불을 살짝 걷으려 손을 뻗자 서민은 온몸으로 버티며 이불을 세게 움켜쥔다. 그 모습에 도재는 피식 웃고는 서민을 이불 째로 포근히 안아버린다. 이불속, 도재의 품 안. 서민은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때, 도재가 귓가에 속삭인다.


“같이 씻을래?”


서민은 달아오른 얼굴로 이불을 걷어내고 욕실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도재는 모든 감정을 담아 다시 서민을 품에 끌어당긴다.


“이렇게 보내줄 순 없지.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서민은 그 품 안에 갇혀 도망갈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이불이 도재의 손에 걷히며 햇살이 서민을 포근히 덮는다. 마치 연극 무대 위, 얼굴 윤곽을 지울 만큼 강렬한 조명을 받은 남녀 주연배우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사랑극의 새로운 2막을 열었다.




24화. 가방 사고 싶어요

도재는 더 이상 조심스러운 연인이 아니었다. 절제의 끈을 놓은 그는 서민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처럼 휘몰아쳤다. 그 뜨거움 속에서 서민은 그동안 도재가 감당해 온 욕망과 인내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 모든 것들을 꾹 참고 자신을 배려해 왔던 도재가 더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숨 가쁘게 지나간 두 청춘의 밤. 뜨겁던 공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서민은 고개를 들어 도재를 바라본다. 그의 극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이 떠오르며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서민은 그 웃음을 도재의 가슴에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눌러 넣는다. 감고 있던 도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서민은 조용히 몸을 빼며 속삭인다.


“씻고 올게.”


온몸 구석 도재의 손길이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샤워기를 틀던 손이 멈췄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이질감. 이상하다. 분명 준비했는데. 혼란에 빠진 서민이 도재를 부른다. 도재는 말없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여자 의사 산부인과’ 같은 검색어를 넣어 찾아봤다. 긴장한 손길로 병원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서민에게 손을 내민다.


“… 여기로 가자.”


병원. 낯선 공간, 낯선 자세. 누워있는 서민의 소리 없는 눈물이 머리카락 틈으로 쉴 새 없이 흘러 들어갔다.


“배란이 되었네요. 사후 피임약 처방해 드릴게요.”


진료실에서 나온 서민의 빨갛게 부은 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재의 몸이 엉거주춤 멈춘다. 수납을 위해 호명하는 간호사의 외침을 두 번이나 놓친다. 병원 문을 나와 복도 끝에 선 두 사람. 비상계단의 서늘한 시멘트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늘 침착하고 담담하던 도재의 떨리는 손이 서민을 감싸 안는다. 그 품에서 서민의 눌러 놓았던 울음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서민은 그저 놀랐고, 갑자기 부모님 생각도 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거기엔 도재를 탓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도재는 그 흐느낌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숨소리마저도 조심하고 있었다. 도재의 어둡게 내려온 얼굴에는 온갖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도재는 그날 이후로 서민에게 너무도 조심스러웠다. 표정 하나, 숨결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민은 그런 도재가 안쓰러웠다. 그의 마음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다.


“낭군~ 나 이제 괜찮아”


먼저 용기를 내어 말했지만 도재는 그저 서민을 가슴에 한 번 더 안을 뿐, 그 안의 자책은 사라지질 않았다. 서민이 조약돌만큼 아프면 도재는 항상 바위만큼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서민은 영화 속 한 장면을 기억해 낸다. 영화 속 여주가 남주에게 장난치는 장면.


“나 Sac(색) 사고 싶어!”


그 말이 마치 나 ‘하고 싶어’라고 들려 남주가 엄청 기뻐하는, 뭐 그런 코믹한 느낌의 영화였다. 서민은 이 장면을 도재에게 써먹어 볼 생각을 한다. 그것도, 학교 도서관 앞을 지나다가.


“낭군”

“응?”

“나 Sac(색) 사고 싶어.”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민을 바라보는 도재의 눈은 마치 은하수가 대폭발을 하는 듯한 카오스였다. 일부러 그 우주의 신비를 조금 감상한 후에 서민이 입을 연다.


“레스포색 가방 말이야.”


서민의 얼굴에 한참 만에 맑게 번지는 웃음. 도재의 원망 어린 눈빛이 서민의 미소를 마중한다.


“이 꿍돌이놈!”


그 한 마디에 도재는 죄책감을 시원하게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 다시 꿍돌이의 낭군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바위가 치워지자 도재의 눈동자엔 거침없이 웃음을 피워내는 서민의 모습이 비친다.


“책임져”

“…응?”


장난스러운 표정 위로 서로를 책임질 준비가 된 두 사람의 감정이 다시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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