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어느덧 훈련소 입소 날.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마주해야 할 날이었다. 서민은 얼결에 도재의 부모님께 처음 인사를 드렸다. 평소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 대신 윤정에게 빌린 단정한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었다. 어색하고 슬픈 마음에 말이 자꾸 많아졌다. 괜히 웃고 괜히 말을 붙였다. 도재의 모습이 훈련소 안쪽 깊숙이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즈음, 참았던 눈물이 터지며, 닦아도 멈추질 않았다. 그때 들썩이는 어깨 안으로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어 주신 도재 어머니.
서민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조금 진정된 뒤 도재 부모님의 차에 올랐다. 정신이 들고 나니 차 안의 어색한 숨결이 서민의 피부를 차갑게 스친다. 논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2시간가량의 시간 동안, 누구도 말이 없이 그저 이산화탄소만 오가고 있었다. 서민은 울음을 쏟는 동안 두 분을 기다리게 한 뒤늦은 자책을 꺼낼 수 없어 그저 삼키고 쌓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도재를 만나 들은 이야기인데 그 무뚝뚝한 두 분이 “서민이가 널 정말 많이 좋아하나 보더라” 하며 흐뭇해하셨다고.
도재가 훈련소에 있는 4주 동안 서민은 매일 편지를 썼다. 혹시라도 누가 시기하거나 괴롭힐까 봐 편지 봉투엔 늘 다른 이름을 썼다.
엄마가, 이모가, 삼촌이... 하다 하다 선생님이 까지.
서민은 야구를 몰랐지만 도재가 궁금해할 보스턴 팀 경기를 그림으로 중계해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어떤 선수가 3루에 있어! 자세한 건 모르지만… 느낌상 보스턴이 이길 것 같아. 우리 낭군도 파이팅!
나중에 훈련소를 나와서 도재가 그 얘기를 꺼내며 웃었다.
“전도재 편지 왔다! 이모가 보내셨는데?”
의아하게 생각하며 편지를 받아보니 명백한 서민이 글씨. 보내는 이만 매일 바뀌어 갔던 같은 글씨 같은 정성. 웃을 일 없는 훈련소 생활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온몸 근육을 다 써서 웃었다 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이 나를 살게 했어.”라고 고백했다.
도재는 제대 후 복학을 했고 서민은 취직을 했다. 비록 원하는 회사에는 가지 못했지만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이었다. 시간에 떠밀려 다른 세상, 다른 공간을 살게 된 두 사람은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게 된다.
서민은 퇴근하며 도재와 통화를 했고, 일주일 중 주말 하루 만나 데이트하는 스케줄이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그 시간은 에너지 넘치는 서민에게는 늘 아쉬웠고, 피곤이 가시지 않은 도재에게는 가끔 버거웠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가야 할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맞춰가고 있었다.
“야, 우리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윤정이 반쯤 들뜬 얼굴로 이모네 파전 집 문을 밀고 들어선다. 졸업 후 자주 못 보던 둘은 일부러 학교 근처에서 다시 만났다. 기름 냄새, 막걸리 냄새, 좁은 테이블.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10년 전 같은 기분이다.
“회사 사람들이 도재 얘기해?”
윤정의 질문에 서민이 막걸리잔을 살짝 내려놓는다. 생각보다 그 말이 가슴에 박혔던 모양이다. 신입사원의 연애사에 어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4명뿐인 입사동기 중에 유일하게 연애 중이었던 서민에게 부서의 많은 이들이 마치 명절에 만난 조카를 대하듯, 다들 한 마디씩 얹곤 했다.
“… 그냥 뭐, 남친이 너무 어린 거 아니냐, 그런 얘기.”
“에이, 또 시작했구먼.”
윤정이 서민의 빈 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운다.
“여자 직장인에 남친이 대학생이면 다 헤어진다는 둥, 뒷바라지하다 끝난다는 둥. 다들 남 일엔 그렇게 말이 많아.”
서민이 살며시 웃는다. 윤정은 늘 그랬다. 서민이 하지 못하는 말들을 대신해 주고, 제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
“신경 쓰지 마. 세상에 자기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애들이 남 연애 판단은 엄청 잘하거든.”
말은 사이다인데 윤정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서민은 그 잔을 조용히 들어 올린다.
도재는 예민한 편이라 스트레스가 심하면 몸부터 반응했다. 공부, 알바, 부모님의 불화까지. 모든 걸 혼자 껴안고 버티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무너졌다. 2주 만에 만나 반갑고 애틋했던 서민과 달리 그날의 도재는 말이 없었다. 멀뚱히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괜찮아? 안색이 많이 안 좋아.”
서민의 걱정이 도재에게 닿기도 전에 도재는 명치를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급성 위경련.
서민은 회사 사이트에 접속해 연차를 냈다. 늘 든든하게 서 있던 큰 산 같은 도재가 그렇게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큼한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도재를 돌봐야 할 시간이었다. 뭐 필요한 건 없는지, 어디 불편한지, 자꾸 살피는 시선에 도재의 쉰 목소리가 다정하게 앉는다.
“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꾹 눌러 참던 눈물이 또 흐른다. 서민은 얼른 슥슥 닦고 씩씩하게 말했다.
“나 연차 냈어. 내가 잘 돌봐줄게.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낭군.”
남자들 가득한 6인실. 좁고 불편한 간이침대. 하지만 서민의 눈엔 오직 도재만 보였다. 다음 날, 퇴원하며 서민은 도재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 앞으로는 말썽 안 피울게. 힘들 땐 옆에 있을게”
도재의 눈은 지쳐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서민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믿어, 김꿍돌.”
그날 이후 서민은 다짐했다. 도재에게 의지만 하는 기울어진 사랑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는 걸. 더 나아가 스스로를 단단히 키워 필요할 땐 도재에게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서민의 충동적이고 철없던 성격은 도재를 만난 후 분명히 조금씩 변해갔다. 하지만 날 때부터 타고난 허당미는 여전했다.
시내버스 정류소 옆 매표소. 바랜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유리창 안쪽에 할머니 한 분이 다리를 오므린 채 앉아 계시고 창문 아래에는 껌, 사탕, 과자 몇 봉지가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다. 스포츠, 연예 신문들이 반으로 접혀 있는 진열대 위, 한 신문의 헤드라인.
<여배우 000, 충격의 헤어누드 화보 촬영>
“낭군, 헤어누드가 뭐야? 대머리로 밀었다는 건가?”
승객을 태우고 출발하던 버스가 끼어드는 승용차에 버럭 경적을 울린다. 도재의 얼굴 근육들이 멈칫멈칫 망설이다, 터지는 웃음에 밀려난다.
“머리털 말고 다른데 노출했다는 거야. 하하하하!”
서민은 고개가 갸웃, 잠시 생각한다.
“겨드랑이 털을 안 밀었다고? 와… 안 창피한가?”
도재는 잡은 손까지 놓치며 허리를 젖혀 크게 웃어재낀다.
“하하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이 없음에도 허리를 숙여 귓속말로 알려준다.
“겨드랑이 아니고 음모야.”
목을 타고 올라온 열감이 귀 끝으로 향하자 고개가 푹 수그려진다. 도재는 아직도 웃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누가 겨드랑이 털을 화보에… 하하!”
터지는 웃음에 살짝 내려앉았던 도재의 무릎이 바로 서더니, 숨을 고르며 서민을 바라본다. 서민은 도재 팔에 매달려선 코를 앞질러 나온 입으로 투덜댄다.
“칫, 집에 가서 뭔지 검색해 볼 거야…”
도재는 순간 멈칫, 고개를 홱 돌려 서민을 내려본다.
“하지 마.”
“왜에, 궁금하단 말이야.”
눈을 굴리며 말끝을 흐리는 서민.
“서민아.”
도재가 성큼 서민 앞에 서서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낮춰온다.
“그런 건 검색하는 게 아니야. 나한테만 물어봐. 그럼 내가 자세히 알려 줄게”
뜨거운 호흡을 담아 귓가에 낮게 떨어진 도재의 목소리에, 서민의 손이 놀라 얼굴을 감춘다. 지나가는 자전거 벨 소리가 서민의 손을 띠링- 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웃고 삐지고 부끄러워하는 감정들의 진폭으로, 오늘도 힘겨운 젊은 날을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