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단차(段差)

다시스물셋

by 아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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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어머님, 고도리!

도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다. 데이트를 하며 즐거웠지만, 부모님의 불화로 어머니가 유독 우울해하신 날은 도재도 종일 기운을 내지 못하였다.


“내가 어머니 한 번 찾아뵐까?”


예기치 못한 서민의 제안에 도재는 진심으로 놀라 두 눈을 끔뻑거리며 서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재… 너도 눈 꿈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내가 낭군네 가서 재밌게 얘기도 해 드리고, 고스톱도 치고. 그럼 어머니 기분이 좀 나아지실 수도 있잖아”


일말의 불편함이나 어려움이라곤 한 티스푼도 들지 않은 서민의 진심에 도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다음 주말,


-낭군! 나 집 앞 도착! 곧 들어갈게!!


비장한 서민의 문자가 도착한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요”


서민이 현관문을 들어서자 도재의 집안에선 20년 넘게 한 번도 흐른 적 없는, 낯설지만 밝고 명랑한 에너지가 훅 밀려들었다.


“어 그래, 서민아. 정말 오랜만이네”


도재처럼 얼굴에 잔잔한 미소만 걸릴 뿐, 활짝 웃는 스타일은 아니셨지만, 자상한 미소로 서민을 맞아 주셨다. 도재의 얼굴 근육 유전은 어머니신 듯했다. 리모컨까지 반듯하게 자리 잡은 조용한 공간. 서민이 동네 마트에 들러 사 온 과일 봉투를 내려놓는다.


“아유, 그냥 와도 되는데”


익숙하고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네주시며 어서 밥부터 먹자 자리에 앉혀 주신다. 거한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보통의 하루에 먹는 식사도 아닌 정갈한 한 상이었다. 맑고 칼칼하게 끓은 게 찌개가 정말로 맛이 있었다.


“우와, 어머니! 이거 진짜 진짜 시원하고 맛있어요!”


비위를 맞추려는 빈말이 아닌 저 아래 단전에서부터 자연스레 치고 올라오는 서민의 특급 리액션이다. 어머니는 “그래?” 짧은 한마디만 하셨지만 얼굴에는 계속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모든 걸 아무 말없이 지켜보는 도재.


식사 후 거실에 고스톱 판을 깔았다. 서민은 고스톱을 짝만 맞출 줄 아는 초보였지만, 아무리 조준해서 던져도 ‘짝’ 소리 한 번 나지 않는 실력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즐겁게 쳤다.


“아앗! 어머니, 고도리!”


어머니도, 도재도 함빡 웃는다. 그때, 띠릭- 현관문이 열린다. 어머니와 도재는 서로 내려앉은 눈빛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서민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 마냥 현관으로 쫄쫄쫄 달려 나간다.


“아버님! 오랜만에 봬요! 저희 고스톱 치고 있었는데 같이 해요. 저는 이제 광 팔게요”


벗으려던 신발 한 짝이 발에 걸린 채 눈을 끔뻑이시던 아버님은,


“허허허. 그래 그래, 반가워요.”


애쓴 웃음을 남기시더니 “잠시 나 옷부터 좀 갈아입고.”하고 방으로 도망을 가신다. 한바탕 왁자지껄한 하루가 지나고 도재가 서민을 데려다 주기 위해 집을 나선다. 갑자기 어머님이 따라 나오신다.


“밖에 쌀쌀하던데 이거 걸치고 가.”


그리고 당신의 카디건을 서민 어깨에 감싸 덮으신다. 사랑이었다. 그렇게 문을 나서 전철역까지 걷는 발걸음엔 바람처럼 가볍고 따뜻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손을 잡은 채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분명히 전해졌다.


“고마워 서민아.”

“이 정도 가지고 뭘. 담엔 내가 고스톱 좀 연습하고 와서 짝짝 소리 나게 잘 쳐봐야겠어! 히히”


도재가 어떤 마음으로 고맙다 한지 잘 알기에 고스톱으로 그 마음을 기분 좋게 보듬어 보는 서민이었다. 그리고 둘만의 마음에 처음으로 가족이 스며드는 날이었다.




29화. 사랑을 건너는 자세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는 도파민이 폭죽처럼 터진다. 상대를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일도 기꺼이 하고 싶어 진다. 말 수 적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그가 서민 곁에 웃으며 오랜 시간 머물 수 있었던 건, 아마 그 호르몬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파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재가 서민의 자취방을 찾는 빈도는 줄어들었고, 그럴수록 서민은 사랑을 증명받고 싶어 했다.


도재와 서민이 함께한 지 4년의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쌓인 시간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연애가 꼭 결혼이나 이별로 끝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랜 연인이라면 한 번쯤은 서로의 미래를 확인하게 된다. 마치 교통정리 하듯이.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온 날, 서민은 알 수 없는 기분에 괜스레 카페 소파에 몸이 점점 파고들고 있었다. 창가에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카페, 버즈의 ‘남자를 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시경, 백지영 노래까지. 2006년,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멜로디들. 서민은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커피만 바라보고 있다. 오른손 검지로 커피잔을 톡톡 두드리던 도재가 자세를 한 번 고치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꿍돌이 서른둘.”

“응?”

“꿍돌이 서른둘 되는 해에, 우리 결혼하자!”


순간 노래가 멈춘다. 창 밖의 길거리를 지나가던 바람도 멈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도재의 프러포즈. 그 표정은 사랑의 감정 위로 비장함이 가득했다. 저 서른둘이라는 숫자를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계산을 했을까. 그런 도재의 진심을 안다. 그래서 서민은 허리를 펴고 앉아 싱긋 웃어 보이며 짧게 고마움을 표한다.


“응! 기다릴게”


서민은 도재의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카페를 함께 나선다. 최근 도재가 자신의 자취방을 찾는 일이 뜸해지고, 스킨십도 점점 줄어드는 게 마음에 걸렸었다. 혹시 도재의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그래서 도재의 “서른둘” 고백은 서민에게 더 큰 안도와 기쁨을 가져왔다. 그동안 괜히 걱정했구나 싶어 마음 가벼이 도재와 길을 걷는다.


종로의 거리는 해가 한창 떠있을 오후 시간인데, 낮게 깔린 먹구름으로 시간이 더 늦어버린 듯 보였다. 쾌쾌한 담배 냄새 사이, 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려 떨어진 빨간 명함들.


-연예인급 미모 상시대기-


서민은 갑자기 몰려드는 구슬픈 기분에 발걸음이 잡힌다. 멈춰진 손에 천천히 서민에게 고개를 돌리는 도재.


“너무 불쌍하다, 이 사람들.”


도재의 턱이 살짝 기울어진다.


“왜 불쌍하다고 생각해?”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랑 잠자리를 해야 하는데 얼마나 비참해.”


도재는 잠시 서민을 말없이 바라본다. 쉬운 문제인데 답을 찾지 못해 끙끙대는 어린 학생에게, 친절한 설명을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듯했다.


“그들이 그걸 선택한 거야 원해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비참하게 생각 안 해”


서민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린다. 냉정한 그의 말이 이유 없이 섭섭하다.


“낭군이 여자 마음을 뭘 알아!”


도재는 벌어지던 입을 끌어와 굳게 다문다. 그리고 익숙한 듯 조용히 다가와 서민을 두 팔로 감싸 안는다.


“그래 알았어… 너 말이 맞아”


그렇게 둘은 바닥도 마음도 어지러운 그 골목길을 벗어난다. 서민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끝엔 툭 안아주는 도재가 고맙다. 그런 도재를 사랑한다. 그날의 포옹처럼, 도재는 항상 서민의 마음을 마지막엔 품어주었다. 하지만 사랑이 항상 그렇게 따뜻하게만 머물지는 않았다.




30화. 임계점에 도달하는 방법

시간이 흘러 도재는 졸업반, 서민은 야근 많은 직장 생활이 한창이었다. 여전히 서로를 좋아했고, 주말마다 만났지만 피곤에 절어 말을 아끼는 도재의 얼굴은 점점 낯설어졌다.


외근지에서 바로 퇴근을 할 수 있었던 날, 서민은 도재에게 연락하지 않고 몰래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 놀랄 도재의 모습을 상상하며 서민의 눈은 웃음이 가득했다. 저 멀리 도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가까이 올 타이밍에 맞춰 서민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도재 앞으로 뛰어든다.


“짠!”


우렁찬 소리에 웃음과 사랑을 가득 담아 도재에게 날아든다. 그런데 어두워진 도재 앞에 서민의 사랑이 닿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지치고 스트레스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쭉 뻗은 팔을 거두던 서민이 멈칫한다. 조금의 반가움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 근처에 외근 나왔다가 낭군 생각나서 이거 사 왔어! 하하”


서민은 이 상황이 버겁고 무거워 손에 든 도넛을 들이밀며 어색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졌을까. 도재가 입을 한 번 더 굳게 다물더니, 한 걸음 다가와 서민을 안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꺼낸다.


“미안해. 오늘 정말 힘든 날이었어”


서민은 괜찮다는 대답 대신 두 팔을 도재의 등 뒤로 돌려 단단히 안는다.


서민은 요즘 자꾸 이유 없이 무기력해졌다. 사실 원인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더 자주 보고 싶고, 더 자주 도재를 느끼고 싶은데, 도재는 자주 아프고 피곤해했다. 서운한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지쳐버렸다.


띠릭-


-이번 토요일에 영화 볼까?


서민은 두 손을 번쩍 들며 몸이 날아오른다. 그 짧은 한 문장이 서민에게 다시 숨을 쉬게 해주는 산소 같았다.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들이 걷히고 맑은 해가 뜬 토요일, 꾸물꾸물 준비하다 보니 상영시간이 코앞이다. 그래도 서민은 간식을 포기 못해 양손에 팝콘과 콜라를 들고 헐레벌떡 상영관에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이미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조심조심 지나가던 그때——


툭.


다른 사람 콜라 컵이 서민의 허벅지에 건드려 떨어진다. 차가운 콜라가 얼음과 함께 쏟아져 내린다. 그 자리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서민. 그런데 도재가 대신 빠르게 사과하고 서둘러 나간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사다 드릴게요”


영화는 이미 시작됐고 서민의 머리는 꺼진 스크린처럼 그저 까맸다. 조금 뒤 도재가 돌아왔다. 새 콜라와 함께 화장실 휴지까지 한가득 들고 조용히 쏟은 콜라를 닦는다. 정리가 마무리되자 쓰레기를 밖에 버린 후 다시 돌아와 옆에 조용히 앉는다. 그때도 여전히 죄책감에 입이 닫힌 서민. 도재가 조용히 서민의 이마를 톡— 건드린다.


“괜찮아”


짧게 속삭인 한 마디. 그 말이 콜라처럼 바닥에 흐르던 서민의 마음을 다시 들어 올려주었다.


“고마워, 낭군”


데이트가 끝나고 나서도 서민은 도재의 손길을 계속 떠올렸다.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마음을 다시 건져 올려준 그 따뜻한 말과 손. 그날 이후 서민은 다시 힘을 내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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