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술을 좋아하는 서민은 대학 동기 윤정이와 함께 ‘우주회(雨酒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무조건 술을 마시는 낭만 가득한 모임이었다. 졸업 후엔 만남이 뜸해졌지만, 그날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비 오는 날의 술 번개가 성사되었다.
대학 다닐 때 윤정과 좋아했던 피맛골 막걸리집을 가고 싶었는데, 재개발을 한다며 문을 닫은 모양이다. 서민과 친구들은 소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면 아무 데고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곳에 새콤 매콤한 양념이 입힌 탱글한 골뱅이가 꽤나 맛있어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한참의 수다와 소주잔이 지나간 후, 서서히 술기운이 오르던 서민이 입에 털어 넣은 잔을 테이블에 힘 없이 내려놓는다.
“도재가 변했어”
서민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한 잔을 더 털어 넣었다. 속이 타는데, 술이 입안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윤정은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빙그르르 굴리다 멈췄다. 서민의 기운 없는 그 말과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애써 덤덤하게 말한다.
“졸업반이잖아. 게다가 알바도 한다며? 그럼 아무래도 예전 같기 힘들지”
서민은 계속 자신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고 도재 편만 드는 윤정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려해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또 훌쩍 비워 버린다.
“근데 너네 둘은 너무 자주 못 보긴 해. 아쉬울 거 같아”
서민을 잘 아는 윤정이기에, 그 말 한마디에 서민은 또 기분이 나아져 한 잔을 더 들이켠다. 그렇게, 서민은 오늘도 완급 조절에 실패해 버렸다.
“야, 서민이 취했어. 도재 불러야겠다”
“안돼! 부르지 마!”
서민이 손을 휘젓지만 윤정은 무표정하게 전화를 걸었다.
“도재야, 와서 서민이 데려가. 많이 취했어”
그 말에 서민의 속이 더 울렁였다. 계획에 없는 일정 싫어하고, 더군다나 요즘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데, 서민의 가슴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재가 술집에 도착할 시간 즘, 서민은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간다. 길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저 앞에서 희뿌옇게 도재의 모습이 다가온다. 두 팔을 조심히 붙잡더니 거의 들어 올리듯 서민을 일으켜 세운다. 서민을 뺀 세상이 모두 2배속으로 돌아가는 느낌.
“일어나, 가자”
술기운에 시야도 청각도 흐릿해진 서민은 비틀거리며 도재에게 기대선다. 정신 차리고 혼자 잘 걸어가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웃음도, 핑계도, 아무것도 지치고 한숨 어린 도재에게 건넬 수가 없었다. 서민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어쩌면 두 사람의 사랑도 그와 함께 작아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재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잠을 쪼개어 가며 학점 관리를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면 수면 시간은 더욱 짧아졌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운동까지 꾸준히 했지만 도재는 자주 아팠다.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위경련이 오기도 했고, 음식을 넘기지 못하기도 했다. 서민은 도재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자꾸 무언가를 하려 했다.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아니야 괜찮아 오지 마. 그냥 좀 쉬면 돼.
-잠깐만 죽 한 그릇만 주고 갈게.
-엄마가 죽 끓여 주셔서 이미 먹었어. 괜찮아.
문자창을 들여다보며 서민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가 힘든 걸 알지만, 자꾸만 생겨나는 이 섭섭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서민은 이미 전철 안에 있었다. 승강장을 건너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너무도 쓰다. 도재를 걱정해야 하는데 걱정보다 큰 섭섭함이, 섭섭함이 가져온 외로움이, 외로움이 가져온 원망이 자꾸만 서민을 흔들어댔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할 때면, 만나서 따뜻하게 안아 줘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도재가 나오면 포용보다 심통이 먼저 새치기를 했다. 그러다 문득 바라본 도재의 뒷모습은 특유의 차가울 힘조차 잃은 듯 빛바랜 회색이었다. 무너진 마음 위에 후회가 밀려드는 서민이다.
“그냥… 안아 줄걸”
도재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서민은 ‘사과하려던 날에 왜 상처만 남겼을까’ 하는 자책을 털어내지 못했다.
젊은 날의 사랑은 마음을 현실로 나누는 수학 공식 같았다. 현실의 무게가 커질수록, 사랑의 값이 자꾸만 줄어들었다.
지독한 눈보라가 훑고 지나간 여름이었다. 서민은 시리고 힘들었다. 하지만 도재는 표현 없이 속으로 더 아파할 걸 알기에 먼저 문자로 손을 내밀어 본다.
-어제 심통 부려서 미안했어요
문자를 늦게 확인했을까, 서민의 문자에 고민이 많았을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도재의 답이 온다.
-내가 더 미안해. 다음엔 꿍돌이 좋아하는 쇼핑 하러 가자.
그거면 되었다. 심장에 박혀 있던 작은 얼음 조각들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숨결에는 어색함도 살짝 껴들었지만 서민은 자신의 밝음으로 흩어내고 도재와의 소중한 데이트를 즐겨본다.
도재는 시간, 재정 관리도 늘 엄격한 사람이다. 그래서 시간 낭비도 싫어하고, 쓸데없는, 혹은 계획에 없는 지출도 굉장히 싫어한다. 하지만 서민은 늘 하고픈 거, 갖고 싶은 게 많아 충돌이 잦았다.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는 편집샵들을 아이쇼핑으로 보고만 다니다가 서민이 눈에 훅 들어오는 목걸이. 자기도 모르게,
“아… 갖고 싶다”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민은 결국 그 가득한 미련을 마음속에 밀어 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닮는다고 한다. 말투가 비슷해지고, 사고방식도 따라간다고… 그런데 서민은 아직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다만 도재처럼 되고 싶었던 순간들은 분명 조금 있었다. 혹은 도재에게 이제 나도 좀 변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은 목걸이를 내려놓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