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미지근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 서민과 도재는 카페에 마주 앉아 서로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도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하나 건넨다. 단정한 격자 패턴의 두툼한 종이 상자. 조심스레 열자, 고이 접힌 편지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전부 50 통.
도재가 함께 만나지 못하는 날들 동안 서민을 생각하며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서민이 도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마음으로 비난하고 원망하던 그 시간에.
서민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편지들을 통해 도재가 여전히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는 확신이 전해졌다. 기뻤다. 고마웠다. 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받는 편지보다 그냥 한 시간이라도 얼굴 보는 게 더 좋은데… 하는 생각에 입 안에 쓴 물이 난다.
도재가 우리의 사랑을 편지에 곱게 담는 동안, 도재를 원망한 자신의 어리숙한 사랑도 부끄럽다. 도재는 오늘도 한 층 더 고결해졌고, 서민은 한 칸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슴이 저릿해 온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키던 서민에게 도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서민은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흐른다. 그 눈물을 한참 바라보던 도재는 서민의 옆으로 옮겨 앉아 따뜻하게 안아준다.
“울보 꿍돌이”
장마가 지나면 나무들은 다시 힘을 내어 초록빛을 띄운다. 비바람이 지나간 사랑의 자리에도 그렇게 다시 초록 내음이 스며든다. 하지만, 그 아래 감춰진 그림자까지 모두 걷힌 건 아니었다.
도파민이 잦아든 뒤에도 도재는 여전히 서민을 사랑했다. 그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그 사랑은 예전처럼 자주 표현되지 않았지만, 서민이 좋아할 노래를 찾아 보내고, 서민이 귀찮아하는 정보들을 정리해 주기도 했다. 시간의 양을 채워주지 못했지만, 사랑의 질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데이트에서 서민은 한 번 더 웃고, 한 번 더 도재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도재는 그날 더 축축하고 무거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서민의 손 한 번 잡지 않는다. 서민은 싸늘하게 뜯기는 마음을 부여잡고 어찌 내색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자”
그 순간, 인내심의 둑이 툭 터져버렸다. 울컥한 마음에 올라온 침이 시큼하다. 입안에 불쾌한 시큼함이 한 바퀴 돌고, 삼키자 목구멍을 할퀴고 내려간다.
“도재야…”
도재는 대답이 없었지만 서민은 말을 이어간다.
“나 아직 많이 사랑하지?”
서민이 어렵게 꺼낸 말이 도재의 눈썹을 흔든다. 영화관 건물 로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그 장소에, 서민은 자신만 홀로 시험대에 올라가 있는 기분이었다. 그 질문에 “당연하지”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일단 그 말 한마디만 들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재의 침묵이 길어져 가자, 서민은 더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그 시험대에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서민은 자꾸만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가 더 사랑하고 있는 걸까?’
‘이 관계가 끝나도 이상하지 않겠지?’
불안은 질문이 되었고, 질문은 행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누군가에겐 상처가, 누군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었다.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고 말았다.
스물일곱, 사람들은 지금이 가장 예쁠 나이라 한다. 그런데 서민은 도재의 손이 자신의 손을 놓을 때마다, 눈빛이 점점 덤덤해질 때마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끝내지 못해 유지해 가는 관계로 느껴졌다. 그가 보낸 메일엔 “미안해. 피곤했어. 요즘 힘들어.”란 말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나를 원하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서민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며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한창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왜 내 사랑만…’
그렇게 마음이 상처받고, 슬퍼지고, 뾰족해지다가 시작된 반격. 하지만 결국 그 반격은 서민을 더 다치게 했고, 도재도 잃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퇴근 후 홍대에서 윤정이와 치킨과 맥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시원하게 살얼음 든 맥주잔을 연신 부딪혀 대며 두 사람은 시원하게 즐겁게 목을 축이고 있었다. 맥주 한 모금마다 웃음이 더 많아진 서민을 보며 윤정이 먼저 입을 연다.
“도재, 여전히 뜸해?”
서민의 기울어지던 맥주잔이 바로 세워져 테이블 위에 놓인다. 작은 살얼음 한 조각이 잔을 타고 흘러내린다.
“야, 넌 이미 할 만큼 했어. 자꾸 뭘 더 하려 하지 말고, 자주 연락 하든 말든 너 생활부터 챙겨. 기다리기 힘들면 나랑 같이 동호회 하자. 거기 사람 많아. 춤추고 땀 흘리면 네 생각도 좀 날아갈 거야.”
서민의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붉어진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지만 곧 윤정의 말에 기운을 내어 고개를 들어 미소 짓는다.
“응! 하자. 동호회”
새로운 취미는 서민의 시선과 열정을 꽂기에 제격이었다. 주말은 당연히 동호회 활동으로 즐겁게 바빠졌고, 평일에도 스윙댄스 외부 강습을 들어야 한다며 퇴근 후 집으로 바로 가는 일이 적어졌다. 그렇게라도 서로 덜 힘들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서민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두 사람 사이엔 회피로 만들어진 평화가 유지되었다.
-오늘 시간 괜찮아? 내가 집 앞으로 갈게.
며칠 굳게 닫혀 있던 문자창이 한 칸 밀려 내려간다. 항상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는 도재가, 데이트가 없는 날인데 먼저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정말 기쁘고 반가울 줄 알았다. 하지만 도재가 어떤 말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두렵고 피하고 싶은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두 사람. 초췌하고 한쪽 눈가에 핏줄까지 터진 도재를 보자 서민은 아래 입술을 잘근 깨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또 치열하게 고민을 하고 왔을까. 어디선가 묵직한 두 손이 나타나 서민의 심장을 꽈악 힘주어 쥐는 듯 통증이 아리게 온다.
“미안했어”
한참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을 보고 있던 도재는 사과부터 한다.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아”
서민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이며 그 말을 되감기 해 본다. 명치에 걸려있었던 이름 모를 응어리가 눈물을 툭 차며 터져 나온다.
흐흐으으윽!
도재가 일어나 카페 휴지를 가져다준다. 그렇게 한참을 서민은 울었고 도재는 휴지를 더 챙겨 왔다. 테이블 위에는 휴지산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동안 모인 눈물이 다 쏟아져 나온 후 서민은 오랜만에 잠들어 있던 꿍돌이를 소환해 투정을 부리듯 도재에게 비음 섞인 질문을 던져본다.
“이젠 나한테 미안할 일 안 하는 거지?”
서민은 투정 반 기대 반으로 묻는다. 하지만 도재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 짧은 정적 속에 수많은 감정이 오간다.
“그건… 모르겠어”
참아왔던 눈물이 다 쏟아져 이젠 더 나올 눈물도 없어서일까. 눈물이 마르고 갈라진 마음 안에서, 그동안 서민이 느낀 상처와 분노들이 힘을 다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말 뿐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그렇다고 대답해 주길 바랐다. 서민은 여전히 외로웠고, 차가워진 도재를 감당하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날의 만남은 도재의 처연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서민의 엉킨 마음을 풀어내지 못한 채 지나갔다
“난 애기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날 이후, 한참이 지나 도재가 보낸 그 메일의 마지막 문장이 보였다. 서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증거를 원했고, 도재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려 했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 앞에서 어긋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