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마음이 힘들수록 서민은 더욱 스윙댄스 동호회 활동에 몰두했다. 도재와의 어색하고 지지부진한 관계 속에서, 서민의 마음속 빈자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동호회에는 늘 사람도, 술자리도 많았다. 그중엔 서민보다 한 살 많은 ‘지훈 오빠’도 있었다. 호탕하고 자상하며, 늘 서민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민은 그저 친절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며 아무런 경계 없이 지훈과 어울렸다.
어느 날, 뒤풀이가 무르익고 술잔이 오가던 중, 지훈은 유난히 서민 곁을 맴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지켜보던 윤정이 조용히 서민의 손목을 끌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너 도재랑 헤어진 거 아니잖아. 그럼 지훈 오빠랑 거리 둬”
서민은 고개를 들고 윤정을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 갑자기 왜 그래?”
윤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진짜 몰라서 그래? 지훈 오빠 마음 안 보여? 너 그 마음 모르는 척하는 거, 솔직히 나 좀 실망이야”
서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는 아무 감정 없는데… 그냥 다 같이 어울리는 건데…”
“네가 누굴 만나든 나는 신경 안 써. 그런데 지금 넌 도재랑 사귀는 중이고, 지훈 오빠는 분명히 작업 거는 중이야. 너도 마음 있는 거면 도재랑 정리하고 오고. 아니면 선을 딱 그어”
윤정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정작 서민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마음도, 판단도 흐릿해졌다.
며칠 뒤, 또 다른 동호회 뒤풀이. 도재는 최선을 다해 밤마다 전화로 문자로 자상하게 안부를 물었지만 서민은 여전히 외로웠다. 더 뜨겁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도재의 피곤 앞에 거절당할 때마다,
‘사랑이 식은 게 아니야. 지금은 힘든 시기일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자리를 지켰다.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서민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 나온 지훈이 자연스럽게 서민 옆에 섰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조용히 서 있었다.
“오늘 다들 신나 보이네요, 술도 더 마시고.”
“응. 너도 많이 마셨지?”
“네… 좀…”
평범한 대화. 특별할 것 없는 그 순간, 지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아…”
윤정의 말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서민의 몸은 이미 멈춰 있었다. 그 안에는 설렘도 없었다. 감정도 없었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순간의 충동을 허락했다.
지훈의 키스가 지나가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도재였다. 그가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까. 그가 모르면, 나는 얼마나 비겁한 걸까. 서민은 깨달았다. 반짝이고 소중했던 첫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한 순간에 망쳤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도재의 설득도, 추궁도, 포옹도 서민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를 배신한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에 결국 서민은 이별을 선택했다.
“그냥… 외로운 게 너무 힘들어”
“취직하면 좀 나아질 거야. 우리 버텨보자”
“아니. 그때는 또 회사가 바쁘다고, 날 혼자 두겠지”
서민은 심지어 이별의 원인을 도재에게 돌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될 도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도재가 혹시 그 사실을 알고도 자신을 안아줄까 봐. 그 품을 다시 기대고 싶은 마음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끝까지 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날의 선택은 20년 가까이 서민의 삶 전체를 조용히 옭아매는 덫이 되었다.
-메리크리스마스
성탄 이브 저녁, 서민의 핸드폰에 문자창이 반짝인다. 아직, 차마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해 “낭군” 이름으로 도착한 도재의 문자다. 서민은 마음이 아리고 아팠다. 하지만 스스로를 벌 주기라도 하듯, 그 아픔을 덜어내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온 세상 축제 같은 성탄절과 새해가, 서민과 도재에게는 차갑고 캄캄하게 지나가 버렸다.
-괜찮으면 잠깐 얼굴 보자.
서민은 도재의 그 문자를 거절하지 못했다. 이별 후 처음 마주한 두 사람. 마주하는 시선도, 말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가운 공기는 아니었다. 도재의 얼굴이 굳어 있지는 않았으나, 애처로워 보이는 눈가를 보니, 서민의 심장이 쓸려 나간다. 그 통증을 가리기 위해 손에 힘을 주어 꽉 쥔다. 도재는 서민에게 계속 시선을 둔 채, 조용히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진작 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주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서민은 선물함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고 있다. 그런 서민을 도재는 금방 놓아준다.
“갈게. 건강하게 잘 지내”
애써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려 끌어당긴 도재의 입가는 그래서 더 슬퍼 보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 서민은 몇 번이고 일어나 도재를 붙잡고 싶었다. 그때마다 두 발에 무겁게 걸린 배신의 올가미가 서민을 굳게 붙들어 잡았다. 옆 테이블 손님이 두 번 바뀌도록 서민은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그러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상자를 열어본다.
목걸이.
서민이 지나가는 말로 ‘사고 싶다’ 했던 그 편집샵 목걸이가 들어있다.
툭… 툭… 투두두두둑…
서민의 하염없는 눈물이 목걸이 상자 위로 후드득 빗물처럼 떨어져 스며든다.
한 계절을 보내며 처참하게 이별이 훑고 지나간 자리엔, 항상 수백수만의 ‘만약’이 우후죽순으로 피어난다. 내가 만약 더 이성적으로 도재를 이해했더라면. 내가 만약 확고히 그 잘못된 키스를 밀어냈더라면. 만약 도재의 현실이 덜 무거웠더라면, 그랬다면 우린 계속 함께 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서민은 운동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고, 도재는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한 사람이었다. 도재가 운동하자고 하면 늘 “나중에~” 하며 웃어넘겼던 서민이었다. 그러다 눈이 수북이 쌓인 어느 햇살 좋은 겨울날, 둘이 길을 걷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서민은 재빠르게 눈을 뭉쳐 도재에게 던진다. 도재 코트에 툭 맞고 흔적을 남기며 떨어지는 눈덩이.
“이히히! 메롱!”
약 올리며 신이 난 서민은 다음 눈을 뭉치고 있다.
“하지 마”
미동 없이 고개만 돌려 내뱉은 짧고 단호한 도재의 말. 그러나 서민은 그 말이 이미 들리지 않는다.
퍽!
하하하하!
“또 던지면 후회할 거야”
세 번째 눈덩이를 뭉치는 서민. 그 순간 갑자기 퍽! 커다란 눈덩이가 서민의 팔로 날아왔다. 부서지는 충격에 얼굴까지 눈 범벅이 되어버린 서민.
“이이이잇”
예상치 못한 반격에 약이 오른 서민은 눈덩이를 들고 달린다. 잽싸게 도망가는 도재.
‘내가 너 꼭 맞히고 만다!’
서민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달려도 도재와 거리는 좁혀 지질 않아 악착같이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도재가 멈추고 나서야 손에 든 눈 뭉치를 날려 보낸다.
퍽!
피하지 않고 맞아주는 도재.
“내가 운동하자 하면 그렇게 싫어하면서, 눈 한 번 맞추겠다고 본관 한 바퀴를 다 돌았네. 하하하!”
“대단하다. 김꿍돌”
도재는 귀엽고 기특하다는 특별한 눈빛을 담아 서민에게 흘려보낸다.
“히익히익. 아 숨차…”
숨 고르느라 서민은 한 마디도 못한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한다.
하하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이 마주한다. 그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며 천천히 흩어진다. 그렇게 그들의 행복했고, 아름다웠고, 가슴 저렸던 사랑도 스르르 흩날려 사라졌다.
햇살도 눈발도 눈부시던 그 하늘에서, 도재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민아, 그만 울고, 앞으론 진짜 잘 살아. 지금의 사랑은 놓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