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물셋
“엄마! 일어나. 헬로카봇 놀아준다고 했잖아.”
예준이 목소리에 깨어난 서민은 마치 오랜 긴 꿈을 꾼 듯했다.
도재와 헤어진 후, 서민은 오랫동안 자신을 탓하고 미워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배신하고, 심지어 그 책임을 돌리고 이별한 비겁함. 미숙함과 두려움이 모든 걸 망쳤고, 도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무언가 관계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며 자신을 비하하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서민은 그 긴 꿈을 통해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비록 그 끝은 이별이었고, 마지막까지도 자신은 철부지였지만, 그 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파했고, 함께 성장했던 그때를.
신랑의 장기 출장으로 한 달째 독박 육아에 지쳐가고 있던 서민이었다. 하지만 ‘왜 나만 이래야 해’라는 말, 이제는 굳이 남편에게 쏟아내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외면하지 않는 진심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서민은 지금도 그 시절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하진 못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뜨거운 실수와 후회가 내 삶을 얼마나 깊이 있게 만들어주었는지. 그렇게 자라난 사랑의 근육이 지금의 이 결혼을, 남편을 조금 더 평온하게 유지해주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그 사랑을 실패라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나를 키운 사랑이었다.
서민은 정수기 옆 캡슐 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 내려 가져온다. 변신에 필요한 카봇들을 모아 온 예준이의 눈은, 기다림 후에 받을 보상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커피 향이 서민의 손에서 코끝으로 스며들고, 예준이의 장난감 소리가 거실에 퍼진다. 작은 어깨가 끊임없이 들썩이는 걸 보니 아이의 조물조물 바쁜 손이 눈에 선하다. 서민은 문득 웃는다. 어쩌면 그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 나를 여전히 자라게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내가 다이어리 꾸민 거 보여줄까?”
서민을 닮지 않아 예쁘게 꾸미고 그리는 걸 좋아하는 예솔이가 화려한 스티커를 가득 붙인 다이어리를 가져와 내민다.
“우와, 우리 예솔이 꾸미기 센스 정말 좋다”
서민은 예솔이를 당겨 안아 엉덩이를 토닥인다. 으쓱해진 아이가 책장의 수납 바구니에서 반짝이 스티커들을 여럿 들고 온다.
“엄마! 내가 엄마 것도 꾸며줄게!”
예솔이의 말에, 문득 서민은 오래 묵혀둔 말을 쓰고 싶어졌다. 스물셋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싱크대 서랍에서 보라색 다이어리를 꺼내 온다. 뜯어진 티백에서 떨어져 나온 녹차 가루를 툭툭 털어낸다.
사랑하는 서민아. 지금의 나는 20년을 돌아온 너야.
항상 밝게 웃는 얼굴 아래로, 똑바로 서기 버거워 엉거주춤한 채로 참 오래 달려왔다. 많이 힘들었지? 어떤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못해서, 가장 만만한 ‘나’를 탓하며 살았어.
그런데 괜찮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선택을 했던 너 자신도 모두 이해하고 존중해. 그로 인해 오해도 생기고 때로는 관계가 힘들어지기도 했지만, 그 미숙함마저 너의 청춘을, 그리고 사랑을 더 순수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줬어.
그땐 왜 그리도 그냥 넘길 만한 일들마저 살얼음 위를 걷듯 아슬아슬했는지 나도 모르겠더라. 그저 버티는 게 전부였지.
그래서 후회가 남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의 네가 있었기에 지금 나는 더 단단하고,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까, 그때의 너를 미워하지 마. 그때의 너도, 지금처럼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던 사람이야. 고마워, 그 모든 시간을 견뎌줘서.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줘서. 늘 사랑해.
―마흔셋의 네가
여기까지 쓰고 나자 엄마의 자리에서 움츠려 들었던 서민의 어깨가 조금 펴지는 듯했다. 계속 자신의 부족함만 보며 탓해온 시간들. 내 아이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 조심했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거라며 눈치 보고 비위를 맞추던 일들. 내가 나로 살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 참고 감췄던 세월. 하지만 이제는 스물셋의 내가, 마흔셋의 나를 깨워냈다.
나는 안다. 이 깨달음 한 번으로 나의 앞날이 환골탈태하듯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최소한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한 번 더 용서와 사랑을 담는 것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나의 청춘은 낭비가 없었다. 나의 젊음 속 실수와 서툶 마저, 이제는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를 사랑해야 지금의 나도, 내 아이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니까.
결혼하고 각자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느라 윤정을 만난 지 5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어린아이들을 아빠에게 맡기고, 만나지 못해 쌓였을 먼지들을 털어낼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아이 엄마들을 만나면 대화 주제의 90%는 육아지만, 윤정과는 대학 시절 추억을 소환하며 오랜만에 하하 호호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뚝 끊기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윤정이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히 서민을 바라본다.
“이젠 너 괜찮은 거야?”
무엇이 괜찮은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민은 그 의미를 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서민은, 마치 윤정에게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다.
“결혼하기 전에라도, 한 번 연락해서 말을 할 걸… 도재가 나에게 실망할까 봐, 또 도망쳤던 거 같아.”
윤정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눈빛에 온기를 담아 서민을 바라본다.
“서민아, 이제 그만 내려놔. 필요 이상으로 너무 오래 짊어지고 살았어”
“서른두 살, 마지막으로 도재를 만났던 그날에 만큼은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도재가 날 원망할까 봐 무서웠어”
윤정은 조용히 웃는다. 예전보다 더 단단하고, 냉정하면서도 다정한 그 웃음.
“원망했겠지. 하지만 네가 가장 자신에게 벌주며 살았잖아. 이젠 그냥 좀 살아. 애 키우느라 숨도 못 쉬면서, 그 짐까지 안고 갈 필요는 없어”
그 말에 서민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는다. 윤정의 말은 오랜 시간 어깨에 얹어둔 돌덩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내는 손 같았다.
“너도 아직 영호 생각날 때 있지 않아?”
항상 육아도 사랑도 서민보다 레벨이 높아 보이던 윤정의 마음도 궁금했다.
“그럼. 가끔은.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고, 사소한 거에 감정이 널뛰었잖아. 후회가 많으니까, 미련도 남는 거지. 첫 아이 키울 때 작은 거에도 벌벌 떨고, 최선을 다해도 지나고 보면 다 후회하는 것처럼. 그래도 봐, 덕분에 둘째는 훨씬 수월하게 키우잖아. 첫사랑 실패 덕에 신랑들도 좀 다룰 줄 알게 된 거고, 하하.”
윤정의 찰떡같은 비유에 서민은 카페 의자에 등을 기대고 빙그레 웃는다. 그렇게 보면 첫째가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서민은 말할 수 있다. 시행착오는 있었어도, 그 시절의 나를 전부 쏟았기에, 후회는 없다. 마치 나의 첫사랑처럼.
서민은 두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왔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간 건지, 누운 햇살 아래 놀이터는 조용했다. 예준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미끄럼틀과 구름사다리 사이를 뛰어다녔다.
"거기 올라가지 마!"
"진정해!"
"조심해, 예준아!"
서민은 예준이의 뒤를 쫓으며 진정시키고, 위험을 막고, 지칠수록 목소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얼굴. 도재.
“쟨 왜 항상 가만히를 못 있지…”
도재가 서민을 보며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겠구나 싶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알겠다. 사랑하면서 속은 썩는 마음. 그래도 결국 사랑이라서 버텨낸 마음.
서민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멀리 누운 햇살 속에 그 시절이, 그 마음이 조용히 겹쳐진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서민을 길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