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다시스물셋

by 아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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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가 지나 도재에게

도재야, 정말 오랜만이야. 내가 이런 식으로 너에게 글을 남기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오랜 시간 돌고 돌아 결국 이렇게 말하게 되네. 이 말이 꼭 너에게 닿아야 하는 걸까, 오래도록 고민했어. 잘 살고 있을 너에게 괜한 파장을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못한 건 아마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책감 때문이야.


이기적인 마음인지도 몰라. 하지만 한 번은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어.


그때, 나는 너를 원망했어. 나의 외로움을 알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너를 미워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는 내가 아닌 삶의 무게와도 싸우고 있었던 거잖아. 그걸 알면서도, 나는 내 외로움이 더 중요하다는 기준으로, 넌 나를 온전히 가질 자격이 없다고, 너무나 잔인한 결론을 내렸어.


잘못은 내가 저질로 놓고, 결국 나는 모든 죄를 네 탓으로 돌려 떠났고, 심지어 다시 마주쳤을 때조차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못했어.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고백해. 그건 오직 나의 어리석음에서 시작된 일이었어.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야. 다만, 혹시라도 네 안에 나로 인한 미안함이 남아 있다면 그건 절대 네 탓이 아니라고 꼭 말하고 싶었어.


과 친구들에게서 너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너의 이름을 검색해 봤어. 놀라울 정도로 쉽게 나온 프로필. 그걸 보며 느꼈어. 넌 그동안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고, 여전히 대단하고, 존경스럽다고.


너에게 이 글이 닿을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혹시라도 이 마음이 너의 마음 어딘가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정말 진심으로, 네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안하게 잘 살고 있길 바래. 그게 들려온다면 지금 이 편지도, 이 고백도 더는 필요 없을 테니까.


마치 너에게 용서받은 듯이, 나도 나를 조금 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에필로그.

첫사랑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써내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던 나의 영혼을 위한 해방 의식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도재를 떠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아프고, 괴롭고, 자책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대충 써내는 것이 아니라 제목까지 붙여가며 제대로 깊게 끌어내고, 후회와 미련을 정리하고 싶었다. 다 쓰고 나면 20년 가까이 나를 묶었던 자책의 사슬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이 글은 단순히 자책을 해소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수많은 기억 속에 갇혀 있던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과정이라는 걸. 그리고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안아주는 시간이었다.


글은 나를 이해하는 거울이었다. 그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반복하던 실수들이 보였고, 그 실수들 덕분에 지금의 나 자신이 더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왜 도재에게 놓지 못할 미련이 남았을까?”

“왜 이토록 깊게 사랑했는데도, 무너졌을까?”


그 모든 질문 끝에는 늘 그럼에도 나는 살아냈고, 자랐다는 사실이다.


글은 나의 ‘용서’이자 ‘용기’였다. 도재 이야기를 쓴 건 도재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때로는 지금의 사랑하는 신랑을 두고 필요 이상으로 첫사랑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정신적 외도는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집착이 아니라 ‘애도’였고, ‘인정’이었고, ‘작별’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사랑했고, 실수했고, 그리고 나를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괜찮다고.


글은 과거의 연애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썼다. 처음엔 도재서민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 안에서 사랑받고 싶어 했던 나, 외로움에 흔들리던 나, 책임과 무력감 사이에서 버텼던 나를 꺼냈다.


그러니 이 글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백이자 선언이다.


이 글을 써 내려가며 20년 전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다, 갑자기 40년 전의 어린 나까지 만나게 되었다.


“이모, 오늘은 엄마 와요?”


여섯 살 무렵,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업실패로 살던 집이 없어지고 오빠는 친가에, 서민은 외가에 맡겨졌다. 외출 준비가 한창이던 대학생 막내 이모는 목에 두르던 목도리를 잠시 멈추고 조카인 서민을 바라본다. 눈동자가 잠시 흐트러진 이불 위를 다녀가는 걸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한 모양이다.


“어, 서민이가 말 잘 들으면 금방 엄마가 오실 거야”


그리고는 한 바퀴 두르다 만 목도리를 마저 감싸 묵고 집을 나선다. 이모 방에 홀로 남겨진 서민은, 그 작은 입술을 앙 다물며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말을 잘 들어야겠다 다짐한다. 그래서 외숙모가 차려 주신 밥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외할머니 심부름도 해 드렸고, 고집쟁이 네 살 사촌 동생과도 한숨을 참으며 한참 놀아줬다. 그리고 하염없이 마당 앞 파란 대문을 힐끔거리며 엄마가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하루가 지나고, 또 말을 잘 들은 열 번의 밤이 지나도록 엄마는 서민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서민은 그 어린 가슴으로, 계속해서 내가 무얼 잘못했나 곱씹고 후회하고 있었다. 동생이 내 인형을 화단에 던진 일로 화내서, 그래서 엄마가 안 오는 걸까. 배가 불러 남긴 밥 두 숟가락 때문일까.


어느 날부터 인가, 일곱 살 서민은 이유도 모른 채 매일 밤 울기 시작했다. 이모가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어, 삼촌이 오시고, 외할머니가 오시고, 결국 호랑이 외할아버지까지 오셨다.


외할아버지가 오셨을 때 사실 서민은 살짝 겁이 났다. 우레 같은 호통을 치실 것 같아 이불을 움켜쥐고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호통은커녕, 호랑이가 아닌 사슴 같은 눈으로, 서민의 힘이 들어간 손 위에 살포시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엄마 꼭 올 거야. 할아버지가 약속해”


그 한마디에 서민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던 그리움이, 슬픔이 봄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서민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 수 있었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여기 둔 게 아니라는 희망. 그거면 되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서민은 그때의 울다 잠든 자신의 얼굴을 따스히 쓰다듬어 준다.


“서민아, 엄마는 그저 올 수 없었을 뿐이야. 그때 일어난 모든 일에 네 잘못은 없어”


이 글을 써내며 수없이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고, 이제 마무리하며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감정에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비록 잘못된 선택들이라 하더라도 표현하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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